항목 ID | GC0580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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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泰元 |
이칭/별칭 | 김준(金準),죽봉(竹峰),김참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송정현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 김태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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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김태원 나주에서 창의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김태원 호남 창의 회맹소 선봉장이 됨 |
몰년 시기/일시 | 1908년 - 김태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김태원 건국 훈장 국민장 추서 |
출생지 | 김태원 출생지 -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 |
사당|배향지 | 진안 이산묘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 |
기념비 | 대한 광복 기념비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 경력 | 의병장 |
[정의]
진안 이산묘에 배향된 개항기 의병장.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원(太元). 별명은 준(準)·김창봉. 동생은 의병장 김율(金律)이다.
[활동 사항]
김태원(金泰元)[1870~1908]은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에서 태어났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동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의 행태에 실망한 그는 잠시 수원에 옮겨 살다가 귀향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고을 아전들의 탐학을 바로잡기 위해 관찰사에게 호소하여 이를 해결하여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06년 동생 김율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기삼연(奇參衍)의 호남 창의 회맹소의 선봉장이 되어 나주·함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1월 3일 기삼연이 담양을 공격하였고 김태원이 담양, 함평, 창평, 영광 등지를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1월 하순에 기삼연은 재차 담양을 공격하고 장차 나주를 치려하였으나 함평에서 크게 패하고 순창군 조동[현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에서 쉬고 있을 때 일본군이 급습하여 사로잡혔고,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총살당했다. 기삼연이 죽자 김태원은 동생 김율과 함께 나주 부근을 근거지로 함평, 장성, 영광, 담양 등 각 군을 순회하면서 무리를 지어 다니며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세력이 한창일 때에는 휘하 의병진이 200여 명이 넘었다.
1908년 2월에 장성군 서이면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패한 후 점차 그 세력이 쇠퇴하였고 광주군 정동 전투에서 김율이 사로잡혔다. 김준은 그 뒤에도 계속 항전하다가 4월 25일 함평군 오산면 박산동[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김태원은 일찍이 병(兵)은 정예(精銳)가 중요한 것이지 숫자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하여 평소 거느린 부하는 30~40명에 지나지 않았다. 치밀한 훈련과 실전을 거쳐 정예 부대에 속해 있던 부하들은 김태원 사후에도 각기 의병장이 되어 각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부하로 조경환(曺京煥)과 오성술(吳成述)·전해산(全海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진안 이산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