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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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圖南 |
영어음역 | Song, do na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낙진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천(鎭川). 찬화공신(贊化功臣)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송세증(宋世曾)이고, 할아버지는 송찬(宋贊)이며, 아버지는 사섬시봉사(司贍寺奉事)를 지낸 송응일(宋應一)이다. 외할아버지는 박응현(朴應賢)이다. 아들로 송섬(宋暹), 손자로 송정필(宋廷弼)을 두었다.
[활동사항]
송도남(宋圖南)[1576~1627]은 1609년(광해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뒤 1615년(광해군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태학장의(太學掌議)로 임명되었다. 재상들의 처사를 개탄하고 흉당(凶黨)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후 평안도선유어사(平安道宣諭御史)가 되었으며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를 거쳐 병조정랑으로 옮겼을 때 갑자기 의주판관이 되었는데 신병으로 부임을 기피하자 영유현감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군이 침공하여 안주(安州)에 이르자 성두(城頭)에 서서 전력을 다해 항전하였으나 몸에 화살이 수없이 박힌 채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는 충의를 가상히 여겨 예조참판에 증직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1682년 관찰사 사우(祠宇)를 세워 그때 순절한 충신들을 합향(合享)했을 때 송도남을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충민사(忠愍祠)라 사액(賜額)했다. 또한 충민(忠愍)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축석읍 축석령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