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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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集斗 |
영어음역 | I Jipdu |
이칭/별칭 | 중휘(仲輝),파서(琶西),구학(臞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호수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중휘(仲輝), 호는 파서(琶西) 또는 구학(臞鶴)이다.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5대손이고 조부는 이석로(李錫老)이며, 감역 이진원(李進源)의 아들이고 부인은 권세모(權世模)의 딸이다.
[활동사항]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나 거주하였다. 1774년[영조 50] 식년시를 통해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직에 올랐다. 그뒤 이조좌랑·장령·이조참의·대사성·승지를 거쳤다. 강릉현감이 되었을 때는 상소하여 해폐(海弊)·군폐(軍弊)·세폐(稅弊)·삼폐(蔘弊) 등 네가지 읍폐(邑弊)를 들어 그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어 대사간·대사헌과 외직으로 안동부사를 지냈으며, 1798년[정조 22]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변방의 야인을 잘 다스렸다.
1800년[정조 24]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순조년간에는 한성판윤·공조판서·예조판서에 올랐다. 1810년[순조 10]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판의금부사·의정부참찬 등을 지냈으며, 판돈령부사로 치사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820년[순조 20] 12월 30일 향년 77세로 운명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정조(正祖)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의 자서(自序)를 해서(楷書)와 전서(篆書)로 첩(帖)을 써서 바쳤다. 이에 정조가 이는 나의 사랑하는 바라고 하여 드디어 새겨서 좌석(座石)에 걸었다.
성품이 호방하고 시와 술을 좋아하였는데,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가 없었다. 이에 그 사촌형이 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농장을 지키게 하였는데 가을걷이를 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계책을 말하여 허락해 주었다. 그 쌀을 거두어서 곧바로 해주(海州)로 가서 부용당(芙蓉堂)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기녀와 음악으로써 즐거움을 삼고 소비하여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돌아올 때는 시권(詩卷)이 한 상자가 되었고, 그것을 돌려주면서 “이것이 봉산에서 가을걷이를 한 문서이다.” 라고 하였다. 이 사실이 『상산지(常山誌)』에 기록되어 있다.
[작품 및 문집]
1795년[정조 19]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영호루중수상량문’을 남겼으며, 글씨로는 경주시 동천동 507-7번지에 소재한 경상북도 기념물 제54호인 경주 표암비(慶州 瓢巖碑)[비제는 ‘경주이씨시조발상지(慶州李氏始祖發祥地)’]가 있다. 표암은 경주이씨의 시조이자 신라 6촌의 근본이 되는 알천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의 탄강지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