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005T030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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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藏마을-特性-三別抄政權의 珍島抗爭과 그 最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 |
집필자 | 변동명 |
[삼별초 정권의 진도 항쟁과 그 최후]
진도의 삼별초정권이 조운로(漕運路)를 장악하자 개경정부의 재정상태는 곤핍을 극하게 되었다. 당장 시급한 군량(軍糧)조차 제대로 맞춰서 대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하루 빨리 진도 를 되찾는 것이 개경정부 존립의 관건이었던 셈이다. 원나라의 입장에서도 삼별초와 남송의 동맹을 방지하고 또한 일본을 정복하려는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도 를 점령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8월에 개경정부의 장군 양동무(楊東茂)와 고여림(高汝霖)이 처음으로 진도 를 쳤다. 탐색적인 성격의 가벼운 공격이었다. 삼별초군은 즉시 반격에 들어갔다. 장흥부(長興府)에까지 쫓아가 주둔 중이던 개경정부의 군사 20여 명을 살해하였다. 아울러 그 지휘관인 도령(都領) 윤만장(尹萬藏)을 사로잡는 한편 재물과 식량을 빼앗아 돌아갔다. 그러자 9월 들어 개경정부와 원에서는 각각 전라도 추토사(全羅道 追討使) 김방경(金方慶)과 원수(元帥) 아해(阿海)를 사령관으로 삼아 진도 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진도 벽파정(碧波亭) 맞은편의 해남 삼견원(三堅院)에 진을 치고 공격을 준비하였으나, 삼별초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삼별초정부의 수군은 병력이나 선함(船艦)의 규모면에서 개경정부와 몽고군의 그것보다 우위에 서 있었다. 그들은 괴물 형상의 짐승들을 그려 넣은 선함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채 물그림자를 비추며 상대를 위협하였다. 훈련이 잘된 수군은 나는 듯 신속히 움직이며 종횡무진하였으므로 능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전투에 들어가면 먼저 공격에 나서는 것은 항상 진도의 삼별초군이었으며, 몽고군 등은 그 기세에 압도되어 전전긍긍하는 형편이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패배한 고려군 사령관 김방경은 삼별초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아 개경으로 압송되기까지 하였다. 패배에 따른 문책을 두려워 한 몽고군 지휘관 아해의 농간이었다. 따라서 곧 죄 없음이 밝혀지고 김방경은 지휘관에 복직되었다. 그리고 다시 진도 공격에 투입되었다.
김방경이 당도해 바라보니, 진도의 적들(삼별초)이 모두 배에 올라 있는데 깃발을 수도 없이 펼쳐 늘인 가운데 그 징소리와 북소리로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듯 요란스러웠다. 또한 진도의 성 위에서는 북을 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기세를 북돋았다. (『고려사』104 ,김방경전)
삼별초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을 잘 보여주거니와, 그리하여 원 장수 아해는 겁을 집어먹고 전투를 포기한 채 배에서 내려 나주로 퇴각하려고 하였다. 김방경은 한편으로 그를 만류하면서 홀로 군사를 이끌고 앞장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그 자신이 곧바로 삼별초군의 전함에 포위되어 진도로 끌려가는 위기를 맞았다. 장군 양동무가 배를 타고 돌격해 오는 틈을 타서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승패는 물으나마나였다.
진도 공격이 잇따라 실패하는 가운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몽고군 사령관 아해는, 고려의 요청에 의해 파면되어 본국으로 소환 당하였다. 그리고 개경정부와 원에서는 진도의 삼별초를 구슬리고 달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강경책 일변도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데 따른 결과였다. 원 세조(世祖)의 조서(詔書)와 고려 원종(元宗)의 유지(諭旨)를 지닌 사신단이 진도로 파견되었다. 삼별초정권에 참여하거나 호응한 모두에게 아무런 불이익도 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안심하고 귀순하라는 회유의 손길이었다.
삼별초가 일어선 이듬해 즉 1271년(원종 12) 정월 6일 개경정부와 원의 사신 일행이 진도에 당도하였다. 삼별초정부에서는 벽파정에 연회를 베풀어 이들을 영접하였다. 하지만 원 황제의 조서는 접수를 거부한 채, 단지 원종의 국서에 대해서만 잘 알겠다며 응답하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는 원에서 온 사신을 억류하는 한편 병선 20척을 동원해서 사신을 옹위해 온 일행을 습격하여 90여 명을 살해하고 배 1척을 납치하였다. 원과 개경정부의 회유책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도 한 차례 원의 사신이 진도에 들어와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진도 삼별초군의 기세만 올려준 채 진압과 회유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개경정부와 원 나라에서는 본격적인 대공세를 준비하였다. 1271년 3월 아해를 대신하여 흔도(忻都)와 사추(史樞) 등의 원 장수가 고려로 파견되었다. 이들과 김방경 등은 진도 건너편 해남의 삼견원에 본진을 설치한 가운데 진도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추는 데 힘을 모았다.
이들이 수립한 계획은 이러하였다. 첫째, 진도 공격은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단행한다. 더위와 장마로 습도가 높아지면 활이 늘어지는 등 전투력에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미 확보된 병력과 장비 외에 추가로 보강해야 할 부분은 고려측이 부담한다. 인근 지역에서 6천 명의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며, 진도 부근에 확보된 260척의 병선에 더하여 140척을 더 징발한다. 그 밖에도 필요한 물품을 차질 없이 공급토록 노력한다. 셋째, 고려 왕족이나 부원배(附元輩)들을 공격의 일선에 내세움으로써 삼별초를 교란함과 동시에 그 사기를 저하시킨다. 삼별초 온왕(溫王)의 아우인 영녕공(永寧公) 준(綧)의 두 아들 옹(雍)과 희(熙)를 진도 전선에 내려 보내며, 부원배 홍다구(洪茶丘) 휘하의 고려영민(高麗領民)을 공격군의 주력 중 하나로 편성하여 투입한다. 넷째, 양동작전(陽動作戰)으로 삼별초를 속이며 빈틈을 찌르도록 한다.
개경 측은 원의 요구에 응하여 병력과 물자를 대고자 크게 애를 먹었다. 개경의 경군(京軍)은 물론 충청도와 경상도에서도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군에 충당토록 해야만 하였다. 개경에서는 군사가 부족하여 문무산직(文武散職)과 백정(白丁)·잡색(雜色)·승도(僧徒)까지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이들은 모든 전투력을 총집결하여 진도 공략을 감행하였다.
고려와 몽고가 연합한 진압부대는 중·좌·우익의 세 부대로 나뉘어 세 방면에서 진도를 공격하였다. 고려군 사령관 김방경과 몽고군 사령관 흔도는 중군을 거느리고 삼별초 정면의 벽파정으로 직접 공격해 들어가고, 몽고 장수 홍다구의 고려인 영민(領民)을 주축으로 한 좌군은 노루목[獐項] 쪽으로, 그리고 고려 대장군 김석(金錫)과 몽고 장수 고을마(高乙磨)가 거느린 우군은 군직구미(軍直仇味)로 상륙토록 하였다.
진도의 삼별초정부에서는 원과 개경 측의 이러한 공격 준비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긴장하였을 듯싶다. 진도 정부의 거점인 용장성은 고려·원 연합군의 집결처인 해남 삼견원과 불과 4㎞ 정도의 좁은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따름이었다. 또한 병력이나 장비 면에서도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 동안의 잇따른 승리에 자만하여 대비에 소홀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양동작전과 같은 상대방의 새로운 전술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은 채, 이전이나 마찬가지로 정면의 방어에만 몰두하였던 데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1271년 5월 15일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은 진도 삼별초 정부를 향한 총공격에 들어갔다. 김방경은 흔도와 함께 중군을 지휘하여 벽파정으로 쳐들어가고, 옹·희 및 홍다구는 좌군을 거느리고 장항에서부터 쳐들어가고, 대장군 김석과 만호(萬戶) 고을마는 우군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에서부터 쳐들어가니, 전함이 모두 백여 척이었다.
적(三別抄)이 벽파정으로 모여들어 중군에 항거하려 하자, 먼저 상륙하였던 홍다구가 불을 질러 협공하므로, 적이 놀라 흩어지며 우군 쪽으로 몰려갔다. 우군이 두려워하여 중군 쪽으로 밀려들려 하니 적이 배 두 척을 나포하여 (타고 있던 군사를) 전부 죽였다. 이보다 앞서 관군(開京政府軍)이 여러 차례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적들이 업신여겨 방비를 하지 않았는데, 관군이 맹렬히 공격하니 모두 처자를 버려둔 채 도망가고 말았다(『고려사절요』19, 원종 12년 5월)
먼저 김방경과 흔도의 중군이 깃발을 휘날리며 용장성 진입의 관문인 벽파정을 향하였다. 좌우익군은 그 뒤쪽에서 틈을 엿보다가, 삼별초군이 벽파정으로 수비 병력을 집결시키자 계획에 따라 좌우로 분산하여 배후 진입을 시도하였다. 홍다구 및 영녕공 준의 두 아들 희와 옹이 거느린 좌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노루목(원포의 뒤편 골짜기)으로 상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지막리(芝幕里)와 오산하리(五山下里) 방면을 거쳐 두시난골로 접어들어 용장성의 뒤편 골짜기로 진격하였다. 김석과 고을마 휘하의 우군은, 군직구미(벽파진과 마산포의 중간)로 상륙하여 도적골을 거쳐 용장성의 동쪽인 난곡(亂谷)으로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정면을 공격하던 중군은, 그 배후에 기습을 받아 우왕좌왕하는 삼별초를 몰아붙이며 마침내 벽파진으로 상륙하여 여유 있게 용장성에 입성하였다.
삼별초군의 결정적인 패인은 여원연합군의 치밀한 양동작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데 있었다. 김방경 등 공격진의 중군이 벽파정으로 밀려오자, 이를 단순한 총공세로만 판단하여 수비 병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측면과 후방에서의 기습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고려사』에서도 삼별초군이 그 동안의 연승으로 상대방을 가벼이 여겨 방비를 소홀히 하였던 덕분에 적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분석하였다. 삼별초군 역시 이를 인식하였던 듯, “너희들이 일찍이 진도로 사람을 보내어 우리로 하여금 느슨히 마음을 풀도록 꾄 다음 대군을 보내어 공파해 버렸다.”(『고려사』27, 원종 13년 5월)며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용장성에서 패퇴한 삼별초군은 금갑포(金甲浦)와 남도포(南桃浦)의 두 길로 나눠 탈주를 시도했던 것으로 전한다. 진도 정부의 왕 승화후 온은 김통정(金通精) 등과 함께 금갑으로 향하던 중 좌군의 추격을 받아 그 아들 환(桓) 과 더불어 홍다구에 의해 참살 당하였다. 당시 원에 가 있던 영녕공 준은 두 아들 옹 과 희 를 진도 공격에 참전시키면서, 자신의 아우인 승화후 온의 목숨을 구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런데 사감(私憾)을 앞세운 홍다구가 먼저 손을 써서 살해해 버렸던 것이다.
홍다구의 아비 홍복원(洪福源)은 일찍이 몽고의 앞잡이가 되어 고려에 해를 끼치던 자였다. 그 홍복원의 몽고 집에 고려에서 인질로 온 영녕공 준이 기숙하던 중 둘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 끝에, 몽고 황족 출신이던 영녕공의 처가 황제에게 고소하여 홍복원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있었다. 그 후 홍다구의 청원으로 일족이 신원되고 홍다구가 그 아비의 뒤를 이어 고려영민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때 진도 공격에 참전하여 온왕 부자를 참살함으로써 그 원한을 앙갚음하려 하였던 것이다.
논수골(돈지벌)에서 혈전이 벌어지고 삼별초정부의 상징적 존재이던 온왕이 무참히 살해되는 경황 중에, 김통정 일행은 겨우 탈주에 성공하여 금갑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남하하였다. 그러나 미처 삼별초군을 따르지 못하고 뒤처진 부녀자들은 부근의 방죽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떼죽음당한 삼별초군의 시신을 함께 매장하였다는 떼무덤(群塚)이라는 터가, 그곳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남도포 방면으로 내려갔다고 하는 삼별초 지휘관 배중손은 거기에서 최후 항전 끝에 죽음을 당했다는 게 현지인들의 전언이다.
진도 를 거점으로 해상왕국을 이루고자 했던 삼별초정부는 이렇게 무너졌다. 강화도에서 봉기하고 미처 1년을 채우지 못해서였다. 다만 김통정의 지휘를 받는 삼별초군의 일부가 제주도로 들어가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제주도에 내외성(內外城)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남·서해안을 횡행하며 조운선을 탈취하는 등 끈질기게 개경정부를 괴롭혔다. 1272년 3월과 5월에는 전라도의 장흥과 탐진 일대를 공략하였고, 6월 초에는 중부 해안에까지 진출하였으며, 9월 초에는 고란도(孤瀾島) 를 습격하여 전함 6척을 불사르고 홍주(洪州)와 결성(結城)·남포(藍浦)의 수령을 붙잡아갔다. 11월과 이듬해(1273) 1월에는 합포 를 공격하여 전함 32척을 불태우고 몽고군 10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삼별초의 위세는 차츰 꺾여갔으며, 끝내는 일종의 해적과 같은 처지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1273년 4월에 김방경과 흔도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완전히 패망하게 되었다. 원종 11년(1270) 6월 이래 강화도에서 진도 그리고 제주도 등지로 옮겨가면서 약 3년가량 계속되었던 삼별초의 대몽항쟁도 이로써 종언을 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