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005T03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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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藏마을-特性-王都 龍藏城의 三別抄 政府와 地域社會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 |
집필자 | 변동명 |
[왕도 용장성의 삼별초정부와 지역사회]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곧바로 새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도성인 용장성(龍藏城)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둘러싼 용장산성(龍藏山城)의 안쪽, 즉 현재의 용장리 일원이 그곳이다. 여기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변의 고인돌 등으로 미루어 늦어도 청동기시대 즈음에 주민이 거주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후 삼국을 거쳐 고려와 조선에 이르도록 이 일대는 대개 진도 고을의 중심적인 위치에 속해 있었다. 가까운 고읍리(古邑里)에 있었다고 하는 그 옛 치소(治所)는 물론이며 현재의 읍치(邑治)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거니와, 확인되지 않아 그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고려시기 언젠가 용장리에 고을의 치소가 소재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인 것이다.
삼별초정권이 이곳에 건설한 궁궐이나 성곽 등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유적지 조사보고에 의하면, 도성의 내성(內城) 격이었던 용장성이 총길이 420여m,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외성(外城)에 해당하는 용장산성이 총길이 약 13㎞가량이며, 산성 안의 면적은 258만 평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궁궐은 기존 용장사(龍藏寺)를 중심으로 조성하였는데, 현재 나타난 건물 유적지만도 약 7천 평에 이르는 것으로 전한다.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세에서, 남쪽의 비좁은 산간 협곡을 남북방향으로 9단, 그리고 그 동쪽과 서쪽에 각 1단씩 돌로 축대를 쌓고 바닥을 정리하여, 크고 작은 건물들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행궁의 터를 흙으로 축조한 420여m의 내성이 둘러싸고 있으며, 다시 그 주위의 50~60m에서 200~230m에 이르는 구릉과 산 능선에 돌로 쌓은 13㎞ 가량의 외성이 휘감아 돌며 보호방벽으로 둘러쳐져 있다.
진도의 새 정부에서는 스스로에게 고려왕조의 정통성이 있음을 자부하였다. 자신들이 옹립한 신왕 온(溫)을 황제라 칭하며 새로 성립한 정권의 권위를 내세우는 한편, 풍수도참설을 바탕으로 삼별초 진도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1271년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서도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을 계승한 정권임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 문서에서는 몽고를 비난하며 그와 적대함을 밝힘으로써 일본과의 연대 및 지원을 기대하였다. 새로운 정권의 성립 이후 그 존재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동시에, 몽고의 침략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도록 설득하려는 외교적 노력이었다.
진도에 웅거한 삼별초정권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 갔다. 전라도 지방의 연안과 섬은 물론이고, 경상도의 남해·거제·마산··김해 등의 지역이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게 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1270년 11월, 즉 진도에 도착한 지 3개월 만에 이들이 멀리 제주도까지 공략하였다는 사실이다. 남방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남송이나 일본과 연결되는 요로에 위치하는 이 섬을 장악함으로써 삼별초정권은 안전한 후방기지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삼별초는 진도 를 거점으로 하여 통일신라시기 장보고(張保皐)가 건설한 청해진(淸海鎭)을 연상케 하는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던 셈이다. 다만 그 근거지가 완도가 아닌 진도라는 점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었다.
해상에서만이 아니라 육지에서도 삼별초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여러 지역에서 삼별초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이 잇달아 들고 일어섰다. 경상도 밀양(密陽) 사람들은 진도의 새 정권에 호응하여 대대적으로 봉기하여서는, 고을의 수령을 살해하는 동시에 다른 지방에도 ‘첩장(牒狀)’을 보내어 그에 발맞추어 일어서도록 선동하였다. 그러자 소식을 들은 주위의 군현(郡縣)들이 모두 ‘바람 따라 (풀이) 드러눕듯’ 일제히 그에 동조하였다고 한다.
수도 개경에서는 관노(官奴)인 숭겸(崇謙)과 공덕(功德) 등이 무리를 모아 다루가치와 개경정부의 관리들을 죽인 다음 진도 정권에 투신하려고 꾀하였다. 경기도 서해안 대부도(大部島)의 주민들은 그처럼 숭겸 등이 봉기하였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아, 섬에 들어와 횡포를 부리던 몽고군을 살해하며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삼별초정권에 호응한 봉기가 거의 전국에 걸쳐 발생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한편 전라도 지방에서는 처음에 상당수의 고을들이 진도 삼별초정권으로 기울어 있었다. 개경정부에서 삼별초를 진압하도록 파견한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 신사전(申思佺)은, 나주(羅州)에 이르렀으나 삼별초군이 상륙했다는 말을 듣고 개경으로 달아나버렸다. 전주부사(全州副使) 이빈(李彬)도 역시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나주부사(羅州副使) 박부(朴琈)는 삼별초에 저항할 것인지 투항할 것인지를 망설이며 눈치를 살피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모두 삼별초군에 맞설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토벌사령관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가장 큰 고을의 수령들이 그 지경이었다.
다른 고을의 사정은 대략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다만 전라도에서 나주지역은 예외였다. 지역 토착세력과 일부 관리가 힘을 합쳐 금성산성(錦城山城)에 들어가 7일 낮밤에 걸친 삼별초의 공격을 막아냄으로써, 나주를 지켜내는 데 성공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나주는 고려시기 전남지역의 유일한 목사(牧使, 3品) 고을이었다. 따라서 그처럼 전남지역의 으뜸가는 고을로서 지역사회의 동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주목이, 삼별초정권을 적대시하며 항전에 나섰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호장 정지려와 같은 토착세력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나주를 지켜냄으로써, 개경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과적으로 전라도 전역이 송두리째 삼별초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거두었던 셈이다. 나아가 나주지역을 보전함으로 해서, 장차 진도의 삼별초정권을 공격할 수 있는 확고한 발판이 전남지역에 마련되었음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요컨대 나주 토착세력으로 상징되는 지역사회의 동향, 말하자면 나주인들의 반진도(反珍島)·친개경정부적(親開京政府的)인 대응이 결국 삼별초정권의 전라도 석권 계획을 좌절시켰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용장성에 들어선 신정권이 몰락하기에 이르는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