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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병마을-자연과 지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4002
한자 郡內面 德柄마을-自然과 地理
이칭/별칭 덕저리,떡저리,덕병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철웅

[자연과 지리]

원래 덕병리는 덕저리, 떡저리, 또는 덕병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건너편 금골산 남서자락의 용인리와 달마산 건너편의 한의리를 합쳐서 법정리명인 덕병리로 병합했다. 그러나 장승이 서있는 마을로 당산제를 모시는 곳은 바로 석장승이 있는 덕병마을이다. 1400년경 처음 마씨가 시거했고, 그후 밀양 손씨들의 증손들이 들어와서 퍼졌으며, 경주 최씨, 신안 주씨도 입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군내면진도대교 건설로 전복 모양의 진도군 초입에 자리 잡게 되었다. 18번 국도를 따라가다 약 10여 분 못 가서 오른쪽으로 기괴한 골체를 드러낸 금골산(195m)이 우뚝 서있는데, 이 산의 급사면 아래인 남동자락에 중심지를 틀었다. 이 산은 원래 화산 폭발시 쌓인 화산재 등이 오랜 세월 동안 굳으면서 돌로 변한 응회암으로, 여러 풍화양상을 겪으면서 오늘날 같은 기괴한 골격이 드러난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남도 방향으로 군도 10번을 따라 약 2㎞ 정도 가면 덕병마을에 다다른다. 금골산이 남으로 달리다 끊어질 듯 이어진 곳이 연산(連山)이다. 해발고도 10~20m 이내의 평지로 이어진 산을, 옛날사람은 진도의 산줄기를 잇는 산이라 보고 이름하여 연산이라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이 곳은 간척 이전에 폭 400m도 안 되는 좁은 목이었다. 사실 이 연산이 아니면 진도는 또 하나의 섬을 이고 살았는지 모른다.

물론 지금보다 해수면이 높았던 약 12만 년 전의 최종간빙기(리스-뷔름간빙기)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한 후빙기의 약 6,000년 전에도 최소한 바닷물이 넘실거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마을을 짓고 산 것은 그 후이므로 연산은 육지인 것이다. 연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면 산 아래 연산제를 만나고 이를 지나면 곧 덕병마을이다.

연산 쪽에서 보면 군도 10번 오른쪽 아래로 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 아래 한눈에 크게 들어오는 너른 간척들, 특히 배나뭇들이라고 부르는 들을 북서쪽으로 마주하면서 해발고도 겨우 5~10m의 고두산(高頭山)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배산이 되는 온화한 고두산은 해발 252.2m로, 제법 바다에선 산세가 있어 보이는 산이다. 고두산 정상에서 약간 서북쪽으로 가면서 한의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슬개재를 지나서 서북쪽으로 더 내려가면 해발 134m의 달마산에 이른다. 이 능선이 바로 덕병마을의 서북 능선이 되고 이 능선과 고두산 북서사면 능선 안쪽에 덕병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완만한 고두산 서북사면을 이용하여 파,고추 등 다양한 계단식 밭들을 일구었고, 그 골짜기 물 한 방울도 아까워 ㄱ자 모양의 저수지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덕병제이다. 덕병제는 연산제와 함께 덕병마을의 앞쪽 작은 간척지를 개간하여 논으로 이용할 때 중요한 농업용수원이었다. 지금은 배나뭇들을 포함하여 주변 간척지들이 전부 기계화를 위한 대규모 농지정리가 격자형으로 잘 다듬어진 데다 군재면 건배산(118.5m) 앞자락에서 진도읍 망치산 앞자락인 파군도까지 연결한 약 3.5㎞의 직선 군내지구 방조제가 과거 군내만을 가로막으면서 거대한 군내호(郡內湖)와 대규모 간척지가 생겨나 아치섬, 보리섬 등은 어느새 육지의 똥뫼(童山)가 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 덕병마을은 이제 내륙 아닌 내륙의 마을이 되었다.

과거 배나뭇들 앞에까지 들락거리던 바닷물이 쌓아놓은 모래땅 사주를 토대로 하여 제방을 쌓아 얻어낸 배나뭇들은 한없이 작게만 보인다. 덕병마을의 중요한 터전이 되었던 배나뭇들은 원래 해발 15m의 당뫼와 달마산 자락을 연결한 것이다. 이 덕병마을의 들녘을 배나뭇들이라고 하는데, 자연지형과 관련지어 지명을 살펴보면, 이는 먹는 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는 배[舟]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바람이 센 해안은 배의 낙과와 염분 때문에 과수재배가 어려운 곳이다. 따라서 이 들녘에 그런 지명이 있는 것은 당연 타는 배와 관련 있어 보인다.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사주(砂柱帶, sand bar)대 뒤의 사구(砂丘, sand dune)열은 소나무가 자생하기 좋은 곳으로, 충남 태안반도처럼 좋은 목재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 배를 만드는 재료가 많아서 배나뭇들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오른쪽 자락에서 희미하게 바다 쪽으로 뻗은 사주대로 연결된 섬이었다. 과거 지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뫼와 달마산 자락을 연결한 이 모래 사주대는 1만 년 전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던 후빙기에 앞쪽에 오래 풍화로 마사가 되어버린 풍화층이 바닷물의 조류와 파랑작용으로 내륙에 밀쳐지면서 형성된 것이다. 섬이었던 당뫼는 육계도가 되어 육지가 되었고, 그 사주대 위엔 지금 보호림으로 보호되고 있는 소나무숲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소나무는 양수이면서 산성토에 잘 자라는 특성이 있어 안면도와 같은 해안가 모래밭(사주나 사구 등)에선 대개 소나무가 잘 자라게 된 것이다. 또한 소나무는 부정과 악귀를 쫓아 마을과 가정을 지키는 신이자, 부귀영화와 자손 번창을 누리게 해준다는 나무이다. 그래서 마을을 수호하는 통신목(洞神木) 중에는 소나무가 큰 비중을 차지했고, 산신당의 신목은 대개 소나무였다. 또한 소나무는 건축재료에서 군선 등 배를 만드는 데 비중이 커서 일찍부터 배의 용재로 사용해왔다. 이곳 당뫼에는 사당은 없고 경주 김씨 납골당이 현대식 석재로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지만 소나무가 둘러쳐져 있다. 이 당뫼 주변 노출된 암벽에선 과거 해안선의 흔적인 구정선(旧汀線)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섬에서 조금 마을 쪽으로 들어오다 보면 두 개의 석장승이 시멘트 도로 양 옆에 몇 그루의 소나무들과 함께하고 있다. 원래 석장승은 5~6년 전에 도난을 당하고 새로 옛 모습을 되살려 제자리에 세워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거무스레한 이끼에 풍상의 세월을 안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상이 아니고, 싱싱한 회백색의 화강암석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젊게만 보인다. 원래 장승은 살기를 막아주는 ‘진살등’으로 마을 어귀에 있어야 하나, 지금의 위치는 마을 어귀가 아닌 오히려 마을 밖에 외로운 모습으로 서있다. 위치로 보아 과거 마을 어귀보다는 필연 바다 쪽 어귀에서 드나드는 뱃길의 안녕을 기원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배나뭇들이라는 지명이나 과거 덕병 말 목장이 있었다는 점, 바닷가에 위치하고, 그 해안의 지형적 증거로 비정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마을의 볼거리이며 진도군의 대표적인 장승이다. 덕병장승제로 불리는 장승제는 정월 보름에 행해지는데, 당굿,샘굿,거리제,장승제의 순서로 진행된다. 우리나라 해안지방에 나타나는 장승은 목장승보다 석장승이 많다. 보성군 득량면 해창마을에도 배가 드나들었던 곳에 석장승이 있고, 제주엔 말할 것도 없이 돌하르방이 자리하고 있다. 태평양 멀리는 이스톤 섬에도 크기만 다를 뿐 석장승이 있다. 추정하건대 이곳도 과거 배가 내륙으로 접안하던 길목의 하나였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당뫼의 주변에 밭자락에선 도자기편들이 이곳 저곳에서 나타난다. 세종실록(세종 27년, 권 110)을 보면 도순찰사 김종서가 말 목장을 짓기 좋은 곳으로 세 곳을 복명하는 가운데 지목한 “해원(海原) 동쪽으로부터 덕병평(德柄平) 사이에 200필을 기를 수 있는 곳”, 즉 덕병평은 아마 배나뭇들을 중심으로 한 고두산 산록을 지칭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은 해안까지 완만한 산록 완사면에 사질토양으로 목초가 잘 자랄 수 있고, 뱃길이 통할 수 있는 데다 고두산에서 내려온 덕병천 물을 수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천연기념물 제101호인 고니, 즉 백조가 이 마을 해안 일대와 진도읍 수유리에 한국 서남단의 유일한 고니 월동지로 보호받는 곳이다. 고니는 늦가을에 날아와 겨울을 나고 다시금 번식지인 북쪽 추운 지방으로 날아가는 겨울 철새로 한반도 남단에서는 12~2월 사이에 월동한다고 한다. 1973년 11월 18일 조사시 이 마을 해안에서 14마리의 유조를 포함한 64마리가 관찰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상서로운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윗길인 군도 10번을 타고 더 서쪽으로 가면 진도읍으로 갈 수 있다. 즉 덕병마을에서 진도읍은 바로 남(南)이지만 동서로 길게 늘어진 배후의 고두산 자락과 그 너머의 망적산, 철마산 자락으로 우회하는 길로 가야 한다. 그래도 잘 포장된 길 덕에 10~15분 이내면 달릴 수 있는 거리이다. 이런 거리감으로 이곳 사람들은 주로 진도읍장과 상설시장을 이용한다.

이곳 마을의 가구수는 약 100여 가구가 대부분 농가로 되어 있고 일부 축산 등 다섯 가구가 비농가로 되어 있다. 인구는 약 225명으로 남자는 108명, 여자는 117명으로 약간 여초 현상이다. 대부분이 60세 이상의 노인들로 고령 인구 비율이 높다. 밭이 약 62㏊, 논이 67㏊로 다른 마을에 비하여 논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경로당의 위치를 통해 본 이 마을의 절대적 위치는 북위 34도 31분 44초, 동경 126도, 15분 30초에 위치해 있다. 마을 향(向)은 남동쪽이 배산인 고두산이 막아서고 북쪽이 바다 쪽으로 터져 있어, 겨울바람인 북서풍이 매섭게 분다. 그로 인하여 대개 마을의 가옥들은 전망 좋은 북쪽보다 높게 올려다보이는 남쪽 비탈면을 바라보고 있거나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가옥의 재료는 흙이나 볏짚과 같은 자연재료는 대부분 사라졌고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벽체로 된 새마을형 개량 가옥이 많아, 돌담 등 정겨운 시골풍경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근자에는 벽돌에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있는 국적 불명의 도시풍 가옥형으로 조성된 집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옛것이지만 깨끗한 손길로 정겹게 다듬어진 가옥이나 돌담길 같은 것들이 도시와 비교될 수 없는 시골, 즉 민속마을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풍경이 점차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덕병마을의 가옥구조는 대문에 들어서면 주로 안채와 바깥채로 되어 있어 남향과 서향을 향해 열려 있고, 동향과 북향은 닫혀 있다. 동쪽에서 들어오는 길을 따라오다 보면 마치 마을 집들이 오는 사람을 마주하기 싫어 모두 돌아선 것처럼 보인다. 고군면 용장리 역시 북향이지만 처마를 더 내어 북향을 기꺼이 받아들인 구조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마을회관과 경로당, 창고, 사료 저장소, 축사, 일반 농가 등이 떡처럼 고두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괴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쪽이 논이면 마을 뒤는 산자락 밭들이다. 해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논과 밭을 일구는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것이 이 마을의 특성이요, 나아가 진도의 특성이다.

덕병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로는, 1962년 군내초등학교 분교로 개교한 금성초등학교가 있는데 군내면 소재지에 위치해 약 2㎞를 가야 한다. 중학교는 군내중학교로 좀더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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