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005T04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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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郡內面 德柄마을-特性-망제와 동제 |
이칭/별칭 | 덕저리,떡저리,덕병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옥희 |
[덕병마을 망제의 특징과 진도 의 동제]
지세로 보아 마을이 허한 곳과 강한 곳이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풍수지리로 보자면 뒤에는 산이 자리잡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가 전통적인 마을의 전형이다. 그리고 산들도 주산(主山), 진산(鎭山), 안산(案山) 등이 있어 마을을 보호한다. 마을의 뒷산이 좌청룡 우백호의 모습이면 더욱 좋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풍수지리적 요소들 중에 혹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인공물을 만들어 비보를 하게 된다.
덕병마을은 다른 마을과는 달리 북향을 하고 있다. 시골에서 북향으로 앉은 마을은 그리 많지 않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덕병마을은 본래 현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훨씬 위쪽에 있었는데, 마을에서 자꾸 살인사건 등 크고 작은 사고와 사건이 잦아서 현 위치로 마을을 옮겼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오래된 집을 보면 지금도 기둥을 비롯한 목제 등에서 뜯어 옮긴 자국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미 마을이 성립되면서부터 이런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여느 마을과는 다른 성촌배경을 가지고 있다. 또 마을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삼별초난 때 이 마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살을 당했다고 한다. 덕병마을의 성촌배경은 풍수지리보다는 역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덕마을병의 망제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덕병마을의 동제는 구조적으로든 기능적으로든 이중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구조적 측면을 요소별로 정리해보면, 망제는 동절기, 충제는 하절기의 제사이다. 또 망제와 충제는 정기적으로 올리지만, 도깨비굿은 비정기적이다. 망제와 충제는 남성중심으로 지내지만, 도깨비굿은 여성중심으로 지낸다. 한편 기능적 측면으로 보자면 당할머니제사와 거릿제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할머니당에서는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것에 반해서 거릿제에서는 혹시 당할지 모르는 재앙을 불식할 목적을 가졌다. 장승에게 하는 헌식은 거릿제의 연장으로 보아도 된다.
한편 기능적 측면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 중 하나는 당할머니의 배우로서 당연히 있어야 할 당할아버지가 없다는 것이다. 호남지역 동제의 신격이 일반적으로 천부지모(天父地母)의 세계상에 근거하여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 반해서 일반적으로 진도에서는 당산할아버지가 잘 발견되지 않는다. 여성신 또는 생산신으로서의 당할머니가 단독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덕병마을의 예가 그 전형을 보인다. 대신에 거릿제는 매우 확대 강화된 양상을 보인다. 진도지역 거의 전체가 거릿제가 기능적으로 강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바로 진도의 역사와 산업과 관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진도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큰 전란 중에 꼭 전쟁터가 되었다. 삼별초의 항몽전쟁이 그렇고,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이 그랬으며, 동학혁명 때는 최후의 격전지로 그 피해가 컸다. 또 섬 지역의 경우는 해난사고가 많아 많은 사람들이 조난을 당하는 등 피해가 많다. 전란 중에 죽은 사람, 해난 사고로 죽은 사람 등은 전형적인 잡귀 또는 객귀(客鬼)가 된다.
지역에 객귀가 많다고 생각된다면 그 객귀들을 위한 제례가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도 전역에 걸쳐서 마을의 동제 중 거릿제가 기능적으로 강화되어 있다면 바로 그 배경에는 거릿제를 통해서 모셔야 할 객귀가 많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진도에는 독특한 여제(厲祭)를 모셨던 것으로 조사연구된 바 있다. 여제란 본래는 관에서 모시던 제사였다. 그러나 조선조 후기에는 전란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피폐화와 다른 여러 요인들로 인해서 관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 많이 축소된다. 따라서 성황제나여제와 같은 관제가 조선조 후기 민간에서 모시게 되는 예들이 많다.
그런데 진도에서는 관제의 하나인 여제가 독특한 형태로 발전을 하게 된다. 진도읍에 예전 여제를 모시던 여제당이 있었는데, 정월 대보름에 마을사람들이 동제를 모시고 나서 한밤중에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 읍촌에 있는 귀신들을 몰아 여제당으로 향한다. 여제당을 에워싼 사람들은 귀신들을 여제당에 가두는 것처럼 몰아넣는 모양을 취하고 실제로 자물쇠로 문을 잠궈버린다. 농사가 시작되는 철에 해를 끼칠지도 모를 귀신들을 잡아가두는 것이다. 그러나 농사가 끝나면 늦가을에 다시 여제당의 문을 열어서 가둬두었던 귀신들이 밖에 나가서 얻어먹고 다닐 수 있도록 풀어준다. 귀신을 잡아가두었다가 다시 풀어주고 하는 풍속은, 그리고 관제로 모시던 여제가 민간의 제사가 되면서 변형된 이러한 제사 방식은 전국적으로 진도에서만 발견된다. 그만큼 진도에서는 객귀에 대한 처리가 크게 고심이 되어왔었다고 하는 증거이며, 이것은 바로 각 마을들에서 거릿제를 확대 강화하여 모시고 있는 사례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한편 덕병마을에서 볼 수 있는 마을신앙 중 하나의 특징은 진도의 다른 마을에 비해서 다양한 신위(神位)와 신체(神體)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당집, 당집 속의 오가리, 그리고 장승 등이 그것이다. 본래 당집 옆에는 태풍에 넘어져버려 지금은 없는 당할머니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수목신체는 매우 일반적이다. 그러나 진도에서 당집이 있는 마을은 그리 흔하지 않다. 더구나 당집 속에 오가리를 두어 그 속에 쌀을 바치는 경우는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가택신앙 중에서 조상단지 또는 성주동이에서 차용해온 방식으로 보인다. 한편 입체적으로 조각된 석장승은 진도에서 유일하게 덕병마을에만 있는 것이다. 대개 지역수호신으로서 입석이나 짐대(솟대)를 세운 마을은 많지만 덕병마을처럼 석장승을 세운 예는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그에 대한 요인은 크게 두 가지가 예측된다. 하나는 부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주술종교적 장치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안될 정도로 절박한 사회적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예상해보기 어렵다. 특별히 덕병마을이 주변마을에 비해서 잘 살았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마을사람들이 다양한 신격을 모시면서, 또한 다양한 신체를 모시게 된 배경으로는 그들의 삶이 조악했거나 또는 항상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속단할 수는 없기 때문에 두 가지의 가능성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