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005T05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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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新面 斜上마을-特性-韓國畵의 脈 |
이칭/별칭 | 비끼내,빗내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원복 |
[한국화의 맥을 찾아-풍광 수려한 진도의 아틀리에]
컴퓨터 시대인 오늘날 우리 삶에 있어 그림과 글씨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중국 춘추시대 대사상가로 유교의 개조인 공자(기원전 551~479)는 종이가 발명되기 훨씬 이전『논어』에서 ‘흰 바탕을 칠한 뒤 그림을 그리는 것[繪事後素]’을 이야기했고 『주례(周禮)』에서도 ‘무릇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칠한 뒤에 한다[凡畵繪之事後素功]’는 언급이 보인다.
새하얀 종이와 검은 먹, 그리고 붓을 발명한 한자문화권에서 우리 민족이 점한 위치는 어디쯤인가. 일상에서는 연필이나 볼펜 등을 사용하는데 오늘날도 서예 인구가 늘고 있음은 무얼 의미하는 것인가. 서화가 단순한 인격수양이나 고답적(高踏的)인 취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까. 나아가 문인화(文人畵)의 존재는 오늘날도 과연 타당성을 지니는가. 이들은 하나같이 정리를 요구하는 명제들이다. 폄하(貶下)에서 재평가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견해가 달라지는 분명한 사실은 이들에 대한 인식에 있어 일종의 변모를 보인다.
이 점은 중국에서의 문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도 궤를 같이한다. 과연 오늘날에도 문인화의 존재는 가능한 것인가. 지난 세기 일정기간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문인화는 이른바 전근대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야말로 경직된 보수의 총체나 근원으로 여겨 용어 자체가 타도 내지 버려야 될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의 경우 그와 같은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나름의 의미를 찾는 긍정으로 선회하기에 이르렀다. 명대(明代)에 있어 지식인 그림에 우위를 둔 이른바 상남폄북(尙南貶北)의 남북종론(南北宗論)에서 출발했으나 개념 자체가 시대에 따라 변했다. 한,중,일 동양 삼국이 공통점 외에 차이점도 없지 않다.
지난 세기 초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별개로 서구의 제국주의 팽창에 의해 일제의 강점을 겪었다. 그리고 세기 중반 우리 강토가 이데올로기 문제로 분단되어 반세기를 넘겼다. 상반된 이데올로기는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전통미술에 대한 견해도 달랐으니 남녘이 채색화를 친일의 잔재로 본 데 대해, 북녘은 수묵담채(水墨淡彩)가 아닌 정밀묘사에 극채색을 사용한 과거 화원이 보여준 공필(工筆)에 가까운 그림을 우위에 두었다.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은 전통회화에 있어 채색과 수묵에 대한 서로 다른 이념적 가치부여를 통해 평행선을 유지해왔다. 식민잔재 청산의 구호를 내세운 남쪽 화단에 있어서 채색화는 곧 왜색(倭色)의 잔재로서 거부되었고, 한편 수묵담채가 전통그림의 법통(法統)으로 보면서도 서양화에 밀려 전근대적인 과거의 산물로 소홀시되었다.
반면에 북녘에선 1960년대 조선화(朝鮮畵) 논쟁을 통해 수묵은 봉건 통치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간주해 거부되고 채색만이 사실주의적 전통으로서 찬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이르러 전통그림 내 수묵화의 위치를 복권시키고, 전통을 보다 폭 넓게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서 주목된다. 민중적 감성이 현실감 있게 표출된 풍속화, 조국애와 강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드러나는 진경산수뿐 아니라, 옛사람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사군자 및 각종 문인화가들의 작품이 우수한 민족전통으로 인정되어 비로소 사랑받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지역을 이야기할 때 단순한 풍광의 아름다음, 즉 승경(勝景)만이 아닌 그 지역의 인물을 반드시 포함시킨다. 인물이 배제된 무대는 의미를 상실함에 좋은 비유가 됨직하다. 풍수지리의 입장에선 산천이 인물을 만든다고 봄이 일반적이나, 어느 쪽에 비중을 두어 먼저 이야기해야 할지는 즉흥적으로 결론 내리기는 힘들다 하겠다. 하지만 이 양자가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지님이 분명하다. 명산대찰(名山大刹)이란 말이 시사하듯 우리 국토의 절경에는 큰 사찰이 점하고 있다. 보배로운 섬 진도는 음악, 미술, 서화 가릴 것 없이 예술적인 면 모든 분야에서 보고(寶庫)이니 그야말로 명실상부는 이에 적합한 이름이 아닌가. 과거의 고귀한 전통을 온축(蘊蓄)하여 오늘에 전해줌에 있어 서화 분야에서 이 지역이 점하는 역할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니 과장 없이 진실로 괄목하게 된다.
문인화에 대한 저간 학계의 관심을 반영하듯 이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여러 곳에서 수차 개최되었다. 민족 문화유산의 보고인 간송미술관에서 동처의 소장품만으로 제16회 기획전「조선문인화」(1979. 5.), 제25회「조선남종화」(1983. 10.)와 제39회「조선남종화Ⅱ」(1990. 10.) 등을 세 차례 개최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역시 자신의 소장품만을 대상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미국 여러 대학박물관에서 순회 전시한「조선시대선비의 묵향」(1996)을 들 수 있다. 1988년 문을 연 개인화랑으로, 연이은 꾸준한 서화 전시로 고서화 발굴에의 기여가 돋보이는 학고재에서 개관기념으로 개최한「19세기 문인들의 서화전」(1988. 10. 14.~10. 24.)과「유희삼매(遊戱三昧)-선비의 예술과 선비 취미」(2003. 11.) 등이 있다. 운림산방에 앞서 먼저 소치가 살았던 시대인 조선 말기 화단의 대세를 살핀 뒤, 이른바 추사파의 법통을 이은 소치가 똬리를 튼 운림산방에 대한 문화사적 의미 등을 살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