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005T06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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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臨淮面 十日市마을-特性-십일시마을과 場市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십일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경숙 |
[십일시마을과 장시]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군거본능에 따라 마을을 형성하게 된다. 주거지 선택에서 중요한 고려사항은 토지로부터 보장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정주농업이 가능한가의 여부일 것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살기 좋은 곳의 조건으로 지리,생리(生利),인심,산수를 들고 있는데, 생리가 바로 정주농업의 조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땅이 기름져야 하고, 다음으로 배와 수레,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 상호 교환할 수 있는 교통의 조건을 들고 있다. 장시의 입지는 바로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곳이다.
다음에는 장시가 열리는 십일시마을과 장시의 영향권인 인근지역은 어떠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장시와의 관계 속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진도군은 진도(珍島)라는 정식 군명(郡名) 외에 옥주(沃州)라는 별호가 있는데, 『여지승람』과 『중정옥주지(重証沃州誌)』에 그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성종 14년(995년) 7월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진도를 옥주라고 잠시 고친 적도 있다. 옥주라는 명칭은 섬 안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 고을 사람들이 3년을 먹을 수 있을 만큼 땅이 기름지고 수산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이숙함(李叔咸)이 1489년 진도에 와서 쓴 글을 통해서도 진도의 풍요로움을 알 수 있다. “진도는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땅이 기름져 목장에는 비단 같은 말들이 들을 덮고, 귤나무가 수풀을 이루니 이야말로 보물의 광이요, 재물의 곳집이니 남쪽 고을의 으뜸이다. 따라서 백제 때 이미 보배로운 땅 진도라 불리며 읍을 설치하게 된다.”
이와 같이 풍부한 산물이 바로 교역의 기반이 되어 시장을 성립시킨다.
진도 농업의 기반은 유기물질이 많이 포함된 중생층 토양으로, 땅이 걸고 기름져서 작물재배에 유리하다.
취락 건설에는 3W(water, work, will)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물의 근원인 하천을 보면, 십일시에는 여귀산맥 서북록에서 발원하여 서북류해 석교포로 유입되는 진도군 제4위(5,576m)의 석교천이 있다. 유역에는 상만(上萬), 송월(松月), 송정(松亭), 봉상(鳳翔), 석교(石橋)마을 등이 입지한다.
석교와 십일시는 석교들, 봉상과 구분실에는 봉상들, 송월, 송정, 흘립골에는 송월들, 중만, 상만, 귀성에는 상만들이 발달하고 있는데, 특히 송월들의 상만답이 유명하다. 진도가 섬인데도 육지부같이 ‘들노래’가 유명한 것은 논과 밭작물에 주력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는 하나의 예이다.
자료(1928년 6월 29일 매일신보)를 통해 진도의 과거 상황을 알아보면, 1928년 현재 진도군 인구는 54,016명, 논 1,300여 평, 밭 1,700만여 평으로 대부호도 없고 극빈자도 없으나 물질적으로 넉넉하지는 않다. 농가는 9,538호인데 지주는 156호로 소수이다. 특산물로는 육지면을 들 수 있는데 연간 300여만 근을 생산하여 생산액이 전남의 12위에 달한다. 쌀과 밀의 생산량은 각각 40,000여 석, 불로초라 불리는 구기자의 연간 생산액은 100만 원이다. 수산물로는 석수어와 대도어의 어획량이 많다. 각 면에는 자동차 편이 있으나, 임회면 팽목항에서 군소 섬들로 이루어진 조도면까지는 한 달에 한 번도 교통하기 어렵다.
진도는 토질이나 기후조건상 농업에 유리하여 수산물보다도 농업생산액이 많은 만큼 주민들은 어업보다는 농업에 주력한다(1940년 8월 15일 매일신보). 1940년의 상황을 보면 면화의 명산지인만큼 주민 60,000만 명 중 20%가 면화재배에 참여하여 전라남도 생산량의 20%를 생산한다.
1904년경 한국에 도입된 면화는 진도군에는 1905년경 이식되어 석교리, 석정리, 인지리 등 구릉지 3,600정보에서 999호가 경작하였다. 기후 조건상 보리타작이 끝난 후 씨를 뿌려도 되고, 다른 밭곡식의 수확이 끝난 11월 중순부터 면화송이를 따도 된다(1940년 8월 14일, 매일신보).
또한 진도는 국내 최적의 소채 채종지로, 유수의 국내 종묘상들이 진도에 채종포를 두고 있으며, 일본 종묘회사들이 씨앗을 받아 세계시장에 판매하는 채종의 고장이다.
옥주차라 불리는 녹차 또한 진도의 유명한 특산품이다. 한번 뿌리박은 곳에서 계속 살아야지 옮겨 심으면 시들어버리므로 정절의 차라는 의미에서 절차(節茶)라고 불리는 녹차는, 군내면 한사리 뒷산성들[마령산 남쪽]의 한산사(寒山寺)에 수백 주, 쌍계사 주위 산상에 몇백 그루, 특히 용장산성 일대에 수천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그외의 특산품으로는 검은쌀, 대파, 홍주, 진도개가 유명하다. 근해에는 난류가 교류하고 있어 어군의 이동이 많으며 어족이 풍부하여 주민의 10%가 어업종사자이다. 11월부터 12월에는 김과 미역을 채취하여 도시로 출하한다. 김은 연간 10만 원 정도, 미역과 어류는 연간 15만 원의 수입을 올린다. 그러나 면화나 구기자 생산액에 비하면 적은 액수이다.
오늘날에도 진도는 비옥한 토양, 온화한 기후조건을 기반으로 농업종사자가 많은데, 섬인 만큼 수산자원 역시 풍족하다. 먼저 자연산 석곽(石霍)인 진도곽(珍島霍)은 전국적인 명품 미역이다. 진도 해태 또한 그 맛으로 유명한데, 김양식의 발달과정은 다음과 같다.
1920년 완도군 고군면의 장현원[당시 30세]이 의신면 금갑리 해안에 김발을 설치하여 시험 재배한 것이 진도군 해태양식의 시초이다. 그후 1935년에 임회면 중만리 주민 6명이 지산면 갈두리에 대나무발을 이용하여 양식한 후 1940년에 갈두주민에게 권장하여 20여 명이 김 양식을 하면서 일반화된다.
1941년에는 일본인 쓰야마 게다로[당시 60세]가 적지로 판단하여 양식 제조과정에 대한 본격적인 강습을 실시하고, 인근지역을 순회하며 강습회 및 지도를 실시한다. 한편 1941년에는 일본 천황에게 진상할 해태를 갈두리 김병남이 생산하여, 그 중 5속을 일본 수산국에 출품한 결과 특품으로 합격하여 천황의 훈장, 상금과 함께 천황 내외의 사진을 받기에 이른다. 이런 연유로 진도 해안 전역이 해태 생산 최적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임회면은 진도읍 남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바다와 경계를 이루며, 하천으로는 명금천, 석교천이 있다. 목장면[지금의 지산면]은 처음에는 100여 명의 목자(牧子)들만 생활하였으므로 임회면에 속하였으나, 1350년 충정왕 때 왜병의 침입 이래 흩어졌던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큰 촌락이 형성되어 임회면과 분리되었다. 목장면에는 사복창(司僕倉)을 두어 그 지역 곡물을 수합하여 보관하다가 방출하였다.
임회면 석교리(법정명)는 자연취락인 십일시, 석교, 고방, 구분실을 포함하는데, 십일시가 6반으로 가장 큰 마을이고, 석교는 4반, 고방은 1반, 구분실은 1반이다. 석교라는 지명은 옛날에 돌다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분실(九分實)은 금구망란(金龜望卵)이란 풍수설에서 유래한다는 설과, 굽은 골짜기 동네를 뜻한다는 설이 있다.
석교리 인구는 1975년 현재 1,717명으로 남자가 853명, 여자가 864명으로 여초현상을 보이며, 농가수가 171호로 비농가(126호)보다 많다. 십일시마을의 인구는 1968년 588명에서 2005년에는 529명으로 감소한다. 2005년 현재 남자가 276명, 여자가 253명, 총188세대 중 농가가 124세대, 비농가가 64세대로 농가수가 많다.
십일시마을은 1920년부터 시작되는데, 10일 간격으로 장이 서면서 한집 두집 모여든 것이 오늘에 이른다. 십일시마을은 진도 제2의 마을로 진도읍과 조도면의 중앙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호한 상대적 입지조건 때문에 1936년 2월 7일 매일신보에는 십일시마을에 우소(郵所)를 두고 임유, 지산, 조도 등 3개 면을 관할할 것을 제안한 기사도 있다. 장시는 임회면과 지산면 주민들에게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대규모 장으로, 지금은 4일과 10일에 장이 선다.
십일시장에 가려면 시외버스나 자가용을 이용하면 된다. 전라도의 중심인 광주역에서 출발한다면, 1번 국도를 타고 나주를 거쳐 13번 국도로 갈아타고 땅끝마을 해남까지 간다. 이곳 해남읍에서 오른쪽으로 18번 국도를 타고 화원반도 끝에 다다르면 명량해협에 우뚝 솟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인 진도대교와 마주하게 된다.
강철 케이블이 지탱하고 있는 이 쌍둥이다리는 제주도와 거제도 다음으로 큰 섬인 진도를 새로운 땅끝으로 만들었다. 18번 국도를 따라 새로운 땅 끝으로 들어서면 진도읍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20분 정도 내려가면 임회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석교중학교를 왼쪽으로 하고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바로 왼쪽에 석교농협이 있고, 그 앞에 십일시교가 눈에 들어온다. 한때 진도장 다음으로 큰 장세를 이루며 마을 이름까지 만들어낸 장시이지만 지금은 오전에만 장이 선다. 십일시라는 마을, 십일시교라는 다리는 여전히 과거의 번창했던 장시를 말해주고 있지만, 정작 장시는 발전이라는 사회의 큰 흐름 속에서 힘을 잃고 말았다.
끝자리가 4와 0인 날, 즉 4일,10일, 14일,20일, 24일,30일이라면 다리 위에서부터 뻥튀기과자를 팔거나 열무,배추,감자 등 채소류 좌판 곁에 쪼그리고 앉은 아낙네들이 눈에 들어온다. 십일시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좁은 골목이 10여m 보인다.
골목 양옆으로는 다방,약국,식품점, 그리고 핸드폰 간판들이 들쑥날쑥 줄지어 있다. 상점 앞에는 자전거,자동차, 알록달록한 옷가지류, 뒷문을 열어놓은 채 과일을 팔고 있는 트럭도 보인다. 막다른 곳은 옛날의 정미소로 장시의 중심부였다고 한다. 정미소 방향으로 들어가니 다시 왼쪽으로 좁은 골목이 꺾어진다.
왼쪽 코너에 덕흥상회라는 철물점이 있고 오른쪽에 미용실과 양품점이 있다. 철물점 유리문에는 페인트,담배,철물이라고 쓴 흰 글씨가 선명하다. 철물점 주인의 말로는, 철물점 앞 정미소 근처를 흐르는 하천이 옛날에는 철물점에서 팔 물건을 비롯해 이곳 십일시장시에 낼 물건을 실은 배가 닿았던 곳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열흘에 한 번 서던 장이 열흘에 두 번 설 만큼 규모가 커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한산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 골목은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지는데, 왼쪽에 희귀한 약재들을 늘어놓은 아낙이 반가이 맞이한다. 앞으로 확 트인 넓은 장터와 장옥이 보인다. 양쪽 4칸짜리 장옥이 8동, 즉 64칸이 있고, 그 앞의 넓은 터에는 알록달록한 파라솔과 큰 텐트를 친 좌판이 들어서 있다.
장옥 바깥 왼쪽에는 묘목과 모판 판매상들이 있고, 가운데 통로에는 그 유명한 진도곽,새우 등 건어물이 펼쳐진다. 오른쪽은 신발, 옷가지들이 보이고 장옥 바깥쪽으로는 집들이 삥 둘러쳐져 있는데, 오른쪽 가옥들은 문을 열어놓은 채 식사류와 술을 팔고 있다.
가옥들로 둥그렇게 둘러싸인 장터의 모습이 우리나라의 장터라기보다는 유럽 도시의 광장과 흡사하다. 옛날이라면 먹거리도 장터에서 중요한 요소였겠지만, 최근에는 본격적으로 장이 서기 전과 장이 끝날 때 간이식당만이 잠깐 활기를 찾을 뿐이다.
장이 새벽 6시부터 11시까지 서는 만큼 상인들은 새벽 4시~5시부터 집을 나선다. 장에 도착하면 오백 원 내지 칠백 원의 자릿세를 내는 난장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텐트를 치고 나서 좌판을 내리느라 분주하다. 자릿세 천 원을 내면 장옥에서 편히 그날 팔 물건만 정리하면 된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면 장터를 감싸고 위치한 왼편의 간판 없는 간이식당에서 한 끼니로 몸을 달랜다.
장터의 가장 깊숙한 안쪽은 생선장이다. 진도주민들이 뻘덕게라고 부르는 껍데기가 두꺼운 게와 낙지,병치,조개류 등 바닷가에서 건져올린 싱싱한 생선류가 힘좋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안쪽 구석에는 새로 만든 정결한 화장실이 보인다.
지금은 입구가 좁아 큰 차들이 들어오지 못해서 장이 더 커질 수 없다고 한다. 화장실 쪽으로 큰 도로가 연결되면 대형 차량이 직접 장터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장이 보다 활성화될 것으로 주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십일시교를 건너 오른쪽 장터로 접어들지 않고 곧장 나아가면 오른쪽에 간판을 내건 식당들이 자리잡고 있고, 왼쪽에는 의원과 기계 간판도 보인다.
원래의 장터는 현재의 임회면사무소 자리에 있었다. 1914년에 면사무소가 이전해 오면서 갈대밭을 매립해 지금의 장터로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