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005T08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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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智山面 禿峙마을-自然과 地理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선,박철웅,황금연,김준,이옥희 |
[자연과 지리]
「남도들노래」의 고장 인지리는 진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산면의 면소재지이다. 과거 해남군 화원지방에 있던 목장을 지산면 지력산으로 옮기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초기에 임회면에 부속되어 오다가 조선시대 중엽 목장면이라 칭하고 관마리에 청을 두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산면 인지리의 절대적 위치인 경,위도 좌표는 북위 34도 25분 27초이고, 경도는 126도 10분 00초로 면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면사무소는 과거 장터 자리에 새로 개축하여 인천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인지리가 속한 지산면은 북동쪽으로 석교천을 경계로 하여 진도읍 및 동쪽으로 석교천과 부용산 줄기를 따라 임회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반면 북서쪽과 남서쪽은 바다에 면해 아래가 넓은 고구마 모양을 하고 있다. 도로의 접근도를 보면 인지리는 진도의 주 간선도로인 18번 국도변 석교에서 서쪽으로 지방도 801번을 타고 가면 약 3㎞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803번 지방도가 남북으로 교차하는 결절점이기도 하다.
인지리의 중심부를 지나는 석교천의 서쪽 지류인 지산천은 길이 약 4㎞에, 12.4㎢의 유역면적을 가지고 있는 지방2급 하천으로 지산면 최대의 하천이고 북서쪽의 지력산 남사면에 있는 인천제를 시작으로 남동쪽으로 흐른다.
이 하천을 삼당산, 지력산, 관마리산을 돌아 부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말발굽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범람을 막기 위해 인지리 마을 지산천은 온통 시멘트 제방으로 둘러싸여 있어, 민속마을에 맞는 자연하천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
이 지산천이 서에서 동으로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면서 북쪽의 인천리와 남쪽의 독치리를 가르고 있다. 현재 지방도 801번도이 하천변을 따라 동서로 지나가고 면사무소 앞쪽에서 북쪽의 고야리로 연결되는 803번 지방도는 남북으로 지나가면서 교차되어 진도읍이나 임회면, 의신면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결절점이다.
인지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지산천이 남동쪽으로 비껴 흐르다 석교천으로 합류하면서 만들어낸 곡지와 지산천으로 흘러드는 소하천 갈래들이 만들어낸 곡저에 논경지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즉 간만의 차가 큰 남서해안 조수의 영향을 덜 받는 곡저평야부인 것이다. 지산면 남부와 서부의 들녘이 대부분 간척지인 데 비하면 이곳은 일찍 개간되어 논경지화 된 곳으로 볼 수 있다.
이곳은 둘러싸인 산지에서 흐르는 소계류들을 막아 인천제, 관마지, 관마1제, 외삼당제 등 조그만한 저수지들을 관개용수로 삼아 작은 곡지를 쉽게 개간할 수 있는 여건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차가운 바람이 부는 북서쪽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남사면 쪽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벼농사 짓기에는 적지이다.
과거 농경시대엔 바닷가의 개펄이나 조수가 드나드는 감조구간의 대하천 주변은 당시의 토목기술로는 접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소하천의 지류변의 사면부, 단구나 범람원으로 이루어진 곡지는 인력으로 개간해 들어갈 수 있었다. 더구나 왜적의 침입이 용이하지 않은 내륙의 천혜의 산지부로 둘러싸여 있어 이 지역은 중요한 농토로 발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오랜 논농사의 경험과 역사는 이곳이 「남도들노래」의 고장으로서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특히 부흥산과 지력산, 관마리산으로 둘러싸인 인지리 주변의 산지들은 안산암질 응회암과 유문암 계통의 암질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오래 세월 풍화되면서 세립질화되어 논농사에 적합한 점토질과 사질이 적당하게 섞인 양토를 구성함으로써 논농사를 짓기에 적당하다.
인지리의 논농사는 대부분 수답으로 물을 관개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이곳 들노래가 세 번의 김매기를 마지막 가락에 넣은 것을 보면 수답 자체가 힘든 잡초를 억제하여 김매기를 줄여주고, 부족한 지력을 물에서 바로 흡수하는 논농사가 진행되었던 것 같다.
만일 물이 부족하거나 경사가 고르지 못한 경우 산두(山稻)를 한 때엔 이보다 훨씬 많은 김매기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이런 자연환경의 토대는 각종 농경사회와 관련한 민속으로 이어지고 보존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오늘날 주곡작물인 벼농사 자체가 소득이 없는 별로 없는 반면에 대파, 겨울배추가 상품작물로서 더 큰 소득원이 되고 있고, 농촌 인력 자체가 고령화되고 있으며, 노동력 부족으로 기계화가 진전되면서 남도의 들노래는 들에서보다 마을 서쪽 부흥산 자락에 자리 잡은 민속놀이 전수관에서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대파를 수확하는 겨울철엔 모내기철보다 더 많은 외부 노동력이 들어와 검게 둘러쳐진 비닐하우스에서 작업하는 것이 이 마을의 새로운 경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비닐하우스에 채소나 과일 대신 아낙네들의 바쁜 대파 다듬는 손길로 채워져 있는 것은 이곳이 역시 대소비지인 대도시와는 아직 먼 길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옛날엔 ‘진도에서 생산되는 곡물만으로도 진도 주민들이 3년은 살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지듯이 홍수와 가뭄의 피해와 왜구의 노략질, 탐관오리의 학정만 없다면 들노래는 매일 불러졌을 것이다.
현재 이곳의 들노래는 인간문화재인 조공례(曺功禮)[1925~1997]와 설재천(薛在天)[1906~1987]이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면서 1973년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전통의 농경마을답게 들노래 외에도 무형문화재인 진도씻김굿과 진도만가, 진도북놀이 등이 함께 마을을 대표하는 민속놀이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엔 비각, 사우, 정여가 남아 있고, 19세기 말 일찍이 천주교가 들어왔으나, 지금은 기독교 계통의 교회가 두 곳 남아 있다.
마을의 남쪽인 독치리는 산록과 하천변을 끼고 덩어리진 모양의 괴촌을 이루고 있는 반면, 인천리는 지방도와 하천변을 따라 산록부에 길게 늘어선 모양을 하고 있다. 대체로 가옥들은 일자형이나 동남방향의 ㄱ자 가옥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안채는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부엌과 광 또는 방을 일렬로 배치하고 안방과 건넌방 앞에 마루를 놓았다. 바깥채를 가진 경우 북쪽이나 서쪽을 가려 세운다.
독치리 입향조는 광산이씨이고 약 1400년경에 입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주요 성씨는 밀양박씨와 김해김씨, 순창설씨이다. 181가구 중 161가구가 농가로 어업은 없다. 인구는 409명으로 인천리보다 약간 많고 여자가 조금 많다. 농경지도 밭과 논이 거의 절반씩 보이고 있다.
최근 돌담이나 흙길 대신 마을 안길을 정돈하고 주택개량을 하면서 마을 경관이 바뀌었고, 마을회관도 2층의 아파트식 베란다를 갖추고 있다. 특이한 유물로는 목장면의 감독을 맡은 감목관비 5기가 있다.
반면 남사면을 향하고 있는 인천리 마을들은 개방형구조에 일자형을 지닌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마을 구조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인천리의 입향조는 밀양박씨로 약 1370년에 입향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순창설씨가 주요 성씨이다.
인구는 328명이고 여자가 많은 여초현상을 보이고, 가구는 130가구 중 120가구가 농가를 이루고 어업가구는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농촌마을임을 알 수 있다. 농경지는 밭과 논이 거의 반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