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2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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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之岱 |
영어음역 | Kim Jidae |
이칭/별칭 | 중룡,영헌,오산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병인 |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도(凊道). 초명은 중룡(仲龍). 고려시대 시중(侍中)을 역임한 김여흥(金餘興)의 셋째 아들로 청도김씨의 시조이다. 선계(先系)는 김알지(金閼智)라 기록되어 있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悅)의 7세손이다.
[생애]
1190년(명종 20)에 경상북도 청도군 하남면 대성리(大城里)에서 태어났다. 1218년(고종 5)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전주사록(全州司錄),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 비서성소감(秘書省少監) 등을 역임하였다.
1247년(고종 34)에 경상도안찰사를 지냈으며, 1255년(고종 42)에 판사재사(判司宰事)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58년(고종 45) 추밀원사(樞蜜院事)에 올랐다. 1260년(원종 1) 정당문학 이부상서(政堂文學 吏部尙書), 1261년(원종 2) 추밀원지사 지공거(知貢擧)를 지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해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266년(원종 7)에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1217년(고종 4) 3만 명의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태학사(太學士)로 입영하여 원수 조충(趙冲)의 측근 참모로 전공을 세웠다. 1218년(고종 5) 전주사록으로 재임 시에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 구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1240년(고종 27) 전라도안찰사로 있을 때는 당시 집권자 최우(崔瑀)의 아들 최만전의 횡포에 맞섰다. 최만전(崔萬全)이 자기의 수하 통지(通知)를 보내 진도에 자신의 요구를 무리하게 주장하자, 김지대는 처음에는 응하지 않다가 직접 최만전을 만나 요구를 즉석에서 들어주었다. 그러나 최만전이 다시 통지를 보내 여러 가지를 요구하자 통지를 묶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최만전은 원망하였으나 김지대를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1241년(고종 28) 진주목사로 재직 시에는 촉석루를 세웠다. 1258년(고종 45)에 몽고명의 침입이 있을 때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서북 지역에 파견되어 서북 40여 성을 안정시켰다.
[작품]
김지대는 고려 10대 문장가로 꼽히는 문장가로,『동문선』에 글이 실려 있다. 1218년(고종 5) 몽고가 침입했을 때 태학사(太學士)로서 입영 당시 방패머리에 써넣은 순두시(楯頭詩)가 전한다.
國患臣之患(국환신지환: 나라의 걱정은 신하의 걱정이요)
親憂子所憂(친우자소우: 어버이의 근심은 아들이 근심할 바이요)
代親如報國(대친여보국: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하면)
忠孝可雙修(충효가쌍수: 충성과 효도를 함께 닦는 것이니라)
유가사(瑜伽寺)의 현액(懸額) 안내문에도 그의 작품이 전한다.
寺在煙霞無事中(사재연하무사중: 안개 서린 고요한 맑은 절가에)
亂山滴翠秋光濃(난산적취추광농: 푸르른 첩첩산은 가을빛이 짙었구나)
雲間絶磴六七里(운간절등육칠리: 구름 사이 절벽은 육칠리라 이어졌고)
天末遙岑千萬重(천말요잠천만중: 하늘 끝 아득히 산봉우리 천만겹이로다)
茶罷松簷掛微月(다파송첨괘미월: 다회 끝난 솔처마에 초생달이 걸려 있고)
講蘭風榻搖殘鍾(강난풍탑요잔종: 염불 마친 평상에 찾아드는 막종 소리 흔들리듯
들려오네)
溪流應笑玉腰客(계류응소옥요객: 시냇물도 응당히 벼슬아치 보고 웃으리라마는)
欲洗未洗紅塵蹤(욕세미세홍진종: 씻을 래야 씻지 못할 세속의 자취로다)
[묘소]
경상북도 청도군 대현산(大峴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오산군(鰲山君)[오산은 청도의 옛 지명]에 봉해졌으며, 조선 후기 숙종대에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에 있는 남계서원(南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영헌(英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