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4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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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政黨活動 |
영어음역 | jeongdang hwaldong |
영어의미역 | political party activities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오승용 |
[정의]
전라남도 진도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전개된 각 정당들의 정치활동.
[개설]
정당(party)의 어원은 pars(일부분)인데, 전체 속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다. 정당의 목적에 대해 에드먼드 버크(Edmond Burke)는 국민의 이익 증진이라고 보았고, 저명한 정치학자 엘머 샷슈나이더(Elmer E. Schattschneider)는 국민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권 장악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보았다. 결국 정당은 국민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책임 있는 정강 정책을 추진하고, 특히 선거에서 후보자를 공천하여 국민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정권의 획득과 유지를 도모하는 자발적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변천]
현대적인 의미의 정당 형태는 아니지만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는 정당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 단체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이 1945년 8월 15일 건국 준비를 위해 자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건설한 정권 예비기관이다.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는 8월 17일 결성되어 최흥종(崔興琮)을 위원장으로 하고 58명의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이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진도군에서는 10월 군민대회를 통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진도군 지부가 결성되어 김중현(金仲炫)이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해체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건국준비위원회 진도군 지부는 인민위원회 지부로 개칭되었다. 이후 각 면에서는 면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군면에 인민위원회 직속의 치안대가 발족하여 청년들이 각 면 지서를 접수하는 등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미군정의 활동이 겹치면서 전라남도 지방의 주요한 정치세력들은 1945년 9월 15일에 조선공산당 전남도당과 11월 초 한국민주당 전남도당으로 양분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회주의 정당인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도당 결성이 이루어졌으며, 우익정당인 한독당 전남도당이 결성되었다.
1946년 3월에는 진도극장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진도군 지부가 결성되어 군 인사 조병수(曺秉洙)가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곽우춘(郭宇春)·김효환(金曉煥)·제민호(諸民濠)·김주환(金周煥)·박동석(朴銅錫)·박희수(朴熺洙)·박병완(朴餠浣)·곽채문(郭採文)·박길준(朴吉俊)·박종관(朴鍾寬)·박병지(朴秉祉)·한병일(韓炳一)·이남원(李南元)·조태운(趙泰云)·하석철(河錫喆)·이근진(李根珍)·이귀덕(李貴德)·설치광(薛治廣)·김일현(金日炫)·김지봉(金智峰)·설재의(薛在義)·곽충노(郭忠魯) 등이 참가했다.
한편 한독당의 진도군당은 조병문이 맡았다. 이러한 정치 구도 속에서 진도군 내에서는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의 정치세력이 대립하였으며, 이는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반탁과 찬탁으로 갈려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제1공화국]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5·10 총선거는 좌익계와 중도파의 선거 불참에 이어 민족주의 세력인 남북협상파가 불참함으로써 반쪽 선거로 치러졌다. 5·10 총선거 당시 전라남도에는 총 29개의 선거구가 설치되었는데, 이 중 진도군은 제29선거구였다.
당시 진도에서는 무소속의 김병회(金秉會),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곽우춘(郭宇春), 한국민주당 박두재(朴斗在), 무소속 허훈(許勳) 등 4명이 입후보하였는데, 총유권자 90%가 투표하는 호응 속에 김병회가 55.4%의 득표율로 초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도군의 정당 소속 입후보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6명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진도군수 출신의 조병문(曺秉雯)이 당선되었다. 이는 진도지역에서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까지는 정당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으며, 따라서 지역사회에 있어서 정당의 지배력이 약했음을 의미한다.
1951년 8월 15일 광복절에 이승만 대통령이 신당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한 이후, 원내와 원외에서 창당 준비를 거쳐 12월 23일에 신당대회를 개최하여 자유당이 출범한다. 당시 자유당 진도군 당부(黨部)로는 박소수(朴燒洙)가 당수가 되어 발족하여 대부분의 군민이 당원이 되었고, 타당은 존재조차 못하였다. 1954년 초 국회의원 조병문이 자유당 군당위원장이 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1년이 지난 1954년 5월 20일에 시행되었는데, 이전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된 바 있는 조병문 후보가 자유당 공천을 받아 무소속 박희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56년 민주당 진도군 당부가 조병옥·박순천 등의 입석 하에 진도군 남동리 소재의 협소한 원예조합사무소에서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서 군 인사 소진춘(蘇鎭春)이 진도군 지부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소수의 각 면당원만이 집회하였다. 따라서 여당의 결성에 비한다면 너무나 초라할 정도로 간소했다.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된 제4대 민의원 총선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선거 양상은 자유당과 민주당의 대결로 압축되어, 자유당이 126석(54%), 민주당이 79석(34%), 무소속이 27석(11.5%), 기타가 1석으로 군소 정당들이 몰락하고 양당제가 확립되어 가면서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나타났다. 진도에서는 자유당 공천을 받은 재선 현역의원인 조병문과 재야연합전선의 총수인 손재형(孫在馨)이 경합을 벌인 결과 무소속의 손재형이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에 들어와서 자유당의 세력이 미약하고, 민주당의 강세가 뚜렷한 가운데 새 선거법에 의하여 1960년 7월 29일에 제5대 국회인 민의원 선거와 최초의 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진도군에서는 당시 39세의 의사 출신 민주당의 박희수 후보가 무소속의 이남준(李南俊)과 손재형 두 후보를 10% 미만의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로써 제1공화국 내내 자유당 중심으로 짜였던 진도군의 정치세력이 바뀌게 되었다. 당시 진도에서는 자유당 후보가 나서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소속 후보가 민주당 후보를 견제했지만, 민주당의 전국적 승세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제3공화국]
1960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63년 초에 정치활동이 재개되어 새롭게 정당활동이 개시되었다. 당시 진도에는 총 5개의 정당 지구당이 창당준비위원회 결성 신고를 했는데 민주공화당(김철수 지부장), 민정당(강구홍 지부장), 신정당(조병을 지부장), 민중당(조시환 지부장), 민주당(김인권 지부장) 등이 정당 등록을 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1963년 11월 26일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도군은 민정당의 힘이 약간 드러나기는 했지만, 공화당의 이남준 후보가 과반수 지지를 얻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민주공화당이 압승을 거둔 선거인 점을 감안한다면, 진도 또한 이와 같은 정치적 역학구도의 추세를 그대로 따라간 셈이다. 다만 전라남도 지역과 진도군에서는 초선의원이 강세를 이루었는데, 이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사회정화 분위기에 편승한 결과로 여겨진다. 특히 전라남도 지역의 당선자 19명 중 초선의원이 12명인 점은 군사쿠데타 이후 정치적 변동의 폭이 상당히 컸음을 반영한 것이고, 진도에서도 회사 사장인 이남준이 초선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과 신민당 외에 민중당과 국민당이 창당되었다. 민중당의 경우 전라남도 제22지구당이 1971년 5월 1일 등록되었는데, 대표자는 박청정(朴淸正)이었으며, 사무소 소재지는 진도군 진도면 남동리 591번지였다. 국민당 전남 제22지구당은 1971년 3월 9일 박상선(朴常愃)이 대표자가 되어 진도군 진도면 성내리 43-16번지에 사무소를 열었다. 이들 두 정당은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못 얻자, 민중당과 국민당은 1973년 7월 2일 정당법 부칙 제2항 및 제3항의 규정에 의하여 등록을 취소당하였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의원 정수의 55.4%에 해당하는 113명(지역구 86명, 전국구 27명)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고, 신민당이 89명(지역구 65명, 전국구 24명), 국민당과 민중당이 각각 지역구 1명씩을 당선시켰다. 통일사회당과 대중당은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진도군에서는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인 손재형이 당선되었다. 손재형은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때 범야권 대표 무소속 후보로 나와서 당선된 경험이 있는 인물인데, 이번에는 여당인 민주공화당 후보로 당선됨으로써 이전의 정치 노선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제4공화국]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고 선언하고,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같은 해 12월 27일에 국민투표를 통해 유신헌법을 확정하였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의 전라남도 제9선거구(해남군·진도군)에 민주공화당은 임충식(任忠植), 신민당은 조시환(曺時煥), 민주통일당은 조대환(曺大煥) 후보를 각각 공천하였다. 선거 결과는 민주공화당 후보가 56.5%의 높은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1976년 4월 21일부터 6월 1일까지 민주공화당 지구당 정기위원회(개편대회)에서 전라남도 제9지구당(해남군·진도군) 위원장에 민암우(閔庵瑀)가 선정되었다. 이후 민주공화당에서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1977년 9월 20일부터 10월 2일까지 15개 지구당 창당 및 개편대회를 가졌는데, 전라남도 제9지구당(해남·진도) 위원장에 김봉호(金琫鎬)가 지명되었다. 김봉호 위원장은 민주공화당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공천을 받아 25.4%의 지지를 얻어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제5공화국]
1981년 1월 29일에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새로 제정한 국회의원선거법이 공포되고, 새 헌법에 따라 같은 해 3월 3일 전두환(全斗煥)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어 같은 달 25일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제1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진도지역에서는 2명 모두 야당의원이 당선되었다. 당시 신군부가 주축이 된 민정당의 위세가 당당한 때에 진도군이 속한 선거구에서 2명 모두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전국적 상황이나 전라남도 지역의 전체적 선거 결과에 비추어볼 때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특히 전라남도 지역에서 유일하게 한국국민당 후보가 당선된 것도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1982년 2월 22일에는 민주정의당 전라남도 제10지구당 진도연락소가 설치되었다. 당시 당연락소 책임자는 조휘석(曺輝石)이 맡았으며, 사무소는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567-21에 위치하였다. 이후 1988년 12월 8일에 민주정의당 진도군 연락소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당연락소 책임자는 조영찬(曺永燦)이 맡았으며, 사무소는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43-15에 소재하였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득표율 35.2%로 148석(지역구 87석, 전국구 61석)을 차지하였고, 신한민주당이 득표율 29.3%로 67석(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을, 민주한국당이 득표율 19.7%로 35석(지역구 26석, 전국구 9석)을, 한국국민당이 득표율 9.2%로 20석(지역구 15석, 전국구 5석)을 각각 차지하였다. 그 밖에 무소속이 4석, 신정사회당과 신민주당이 각 1석씩 차지하였고, 자유민족당과 근로농민당은 1석도 얻지 못하였다.
진도군에서는 민정당의 정시채 후보가 당선되었다. 당시 정시채 후보의 득표율은 거의 50%에 육박하였는데, 제11대 국회의원과 전라남도부지사를 지낸 정후보가 권력 실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상당수의 득표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제6공화국]
1987년 10월 29일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제9차 개정헌법이 공포되고, 이 개정헌법에 따라 같은 해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 노태우(盧泰愚)가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에 나선 주요 정당으로는 민정당·평민당·민주당·공화당·한겨레당 등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는 해남과 진도를 하나의 선거구로 통합하여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평민당이 서울지역과 호남지역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제1야당이 되었다. 평민당은 전라남도 18개 선거구에서 17개 선거구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의석 점유율 94.5%의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진도에서도 평민당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놀라운 결집력을 보인 호남 민심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진도군 선거구의 김봉호 후보는 63%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제14대 국회 개원 후 민자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를 위해 무소속 당선자 3명을 영입함으로써 인위적인 정계 개편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후 김영삼 정부의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재산공개 파문, 당내 파벌로 인하여 내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충청권 정치세력이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제1야당인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서울 등지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김대중의 정계복귀 수순에 따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진도에서는 평민당, 민주당의 뒤를 이어 새롭게 등장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봉호 후보가 당선되었다.
1997년 12월 17일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40.3% 1,032만 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가 38,7% 993만 표, 이인제 후보가 19.2% 492만 표로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있어 의원 정수는 273명(지역구 227명, 전국구 46명)으로, 제14대에 비해 26명이 줄었다. 정당은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을 비롯해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 민주국민당, 민주노동당, 청년진보당, 한국신당 등 7개 정당이 참여하였다. 진도군에서는 무소속의 이정일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48.9%의 지지를 얻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57만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정부 말기에 발생한 대통령 친인척비리 사건 등으로 인해 완승이 예상되었지만, 막판에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극적인 단일화 성공에 힘입어 두 번째 패배를 맞이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주당과 결별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이 와중에서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연합하여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함으로써 민심과 정당 지지도가 순식간에 열린우리당 지지로 돌아섰다. 그리고 2004년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의석을 차지하였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과 원내 제3당 차지, 민주당과 자민련의 참패라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