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2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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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現代 |
영어음역 | Keunhyundai |
영어의미역 | Modern Histor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정자 |
[정의]
일제강점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라남도 진도군의 역사.
[개설]
일제강점기와 현대의 진도의 역사는 민족사의 고난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진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이 일찍부터 시작된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진도가 목포·해남에 인접한 다도해의 요충지로서 풍부한 농·수산물의 생산지인 때문이다. 이런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해 진도민의 저항 또한 거세었다. 또한 3·1운동 당시 진도군에서는 3월 25일과 4월 1일 읍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으며, 4월 16일에는 의신면·지산면·고군면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의 8·15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환희와 함께 혼란과 고통도 아울러 가져다주었다. 진도지역 역시 해방 후의 어느 공간이나 마찬가지로 좌·우익 간의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한국 화단을 주도하는 남종화풍을 성립시키고, 고유한 민속을 보존 발전시켜 민속의 보고라 불리는 등 어느 지역보다도 탁월한 문화역량을 응축 발전시켜 온 점이 주목된다. 육지와 근접해 있어서 육지의 문화를 재빨리 수용하면서도 섬이라는 조건에서 육지의 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유지 발전시킨 독자성을 발휘하였다는 사실에서 진도 문화의 역사적 특성을 찾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행정구역 개편]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여 김홍집(金弘集)을 수반으로 하는 갑오내각을 출범시키고 개혁을 추진토록 하였다. 또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한반도의 강점 야욕을 노골화해 가고 있었다. 이 갑오내각에 의해 추진된 개혁을 갑오개혁이라 하는데, 관제 뿐 아니라 사회의 여러 구조, 예컨대 계급제 폐지, 노비제 폐지, 조혼(早婚) 금지, 서얼차별 타파, 과거제 폐지 등 여러 부분에 걸친 일대 개혁을 추진하였다. 아울러 1895년에는 지방제도도 개정하여 종래의 8도제를 폐지하고 새롭게 23부(府) 331군(郡)으로 구분하여 부에 관찰사를 배치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이로써 전라도는 나주부, 전주부, 남원부의 3부로 나뉘게 되는데 진도는 나주부의 소속군으로 되었다. 다시 4개월 후인 9월 1일 군내의 면·결(結)·호(戶) 수의 다소에 따라 각 군을 1~3등으로 등급을 정했는데 진도는 3등 군이 되었다.
약 1년여 뒤인 1896년에는 다시 23부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제로 개편하고 군의 등급을 5등급으로 구분하는데, 이때 예전의 전라도를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누었다. 진도는 전라남도에 속한 3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903년에 진도군에 속해 있던 도초면·안창면·기좌면이 진도군에 편입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1896~1903년 사이의 진도군 예하의 면제의 변화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른 내용들이 언급되고 있어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소 복잡하게 전개된 진도군내의 행정제도 및 구역 변동사정을 다시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895년 5월 1일, 전국 23부제로 개편하여 나주부 진도군이 되었고, 1903년 진도군에 속해 있던 도초면·안창면·기좌면이 진도군에 편입되었으며, 1906년 9월 24일 진도군에 속해 있던 삼촌면을 해남군에, 명산군을 영암군으로 이속하였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초면과 안창면·기좌면을 무안군에 이속하였으며, 1895년 혹은 1896년 사이에 2분된 여러 면들을 다시 합쳐 7면 101리로 통폐합하였다. 한편 1917년에는 부내면이 진도면으로 바뀌었다.
광복 이후 진도는 좌·우익 간의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었으나,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새로운 제도와 질서가 수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행정구역의 개편도 이루어졌다. 그 중 진도군내에서의 행정구역을 조정한 몇 차례의 변경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63년 1월 1일 진도군 조도면 마진도리를 무안군 장산면에, 1973년 7월 1일 군내면 일부를 진도면에 편입하였으며, 동년 11월 20일에는 군내면 죽전을 분리하였다. 1979년 5월 1일 진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2년 1월 1일에 신의면 구자리(狗子里)가 구자리(九子里)로, 신의면 침계리 수용소가 진설리로 개칭되고, 1983년 2월 15일 조도면 만재도리와 가사도리의 일부가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1985년에 진도대교가 가설되어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1987년 1월 1일에 임회면 염장리가 진도읍에 편입되었다. 1990년 8월 1일에 신안군 장산면 저도 등 도서 일부가 진도군에 편입되었다. 1992년에는 의신면 도목리, 접도리, 임회면 죽림리, 지산면 소앵무, 심동리 등이 분리되었다.
[일제강점기]
진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이 일찍부터 시작된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진도가 목포·해남에 인접한 다도해의 요충지로서 풍부한 농·수산물의 생산지인 때문이다. 이런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해 진도민의 저항 또한 거세 이미 1909년에 일본의 경찰서나 농사경영자들을 습격하는 봉기를 일으키고 있다.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도에서도 역시 3월 25일과 4월 1일 읍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으며, 4월 16일에는 의신면·지산면·고군면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진도에 있어서 3·1운동 집회횟수, 집회 참여인원과 사망인수, 피상인수, 피수인수 등에 대한 통계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 집회상황이나 피해상황에 대하여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1924년 7월에는 진도에 소작인회가 조직되어 1년여 만에 회원 수 5,000으로 늘어났다. 이 소작인회는 창립총회에서 소작료 납입은 4할에 준하여 실행 하겠다 하고, 이 조건을 따르지 않을 때는 납입하지 않겠다는 ‘소작료불납동맹’을 결의하였다. 지주 측도 이에 맞서기 위해 ‘지주인회’를 열어 대응방안을 모색하였고, 이에 따라 1924~1925년에 걸쳐 소작료 인하 등을 요구하는 소작쟁의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소작쟁의는 몇 사람의 주동자가 경찰에 구금되고, 또 지주 측의 회유와 설득 등에 의해 지주와 소작인 어느 쪽도 일방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타협에 의해 마무리되었는데 ‘소작료는 5할로 하되 다만 관습 또는 사정에 의해 그 이하로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한다. 이 소작쟁의를 주도한 인물은 소진호(蘇鎭浩), 박종협, 박순직(朴淳稷) 등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또한 주목되는 사건으로는 1934년 4월에 결성된 「진도적색농민조합」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이 적색조합운동은 곽재술(郭在述)·조규선(曺圭先)·곽재필(郭在必)·박종협·박종춘(朴鍾春)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으며, 그 행동강령을 보면 농민들의 현실적 문제에 깊이 개입하여 소작농민들의 일상적인 이익을 옹호하려는 것으로 채워져 있으나 다른 지역의 농민조합운동에서 보이는 정치적 성격의 강령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한다. 그러나 불과 4개월여의 짧은 기간 만인 1934년 8월에 해체됨으로써 진도지방의 민족운동에 끼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진도 지역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저항과 독립을 위한 투쟁은 멈출 줄 몰랐다. 일본의 경찰서나 농사 경영자 습격, 3·1만세운동, 소작쟁의 등의 항일운동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진도적색농민조합과 같은 조직이 해체됨으로써 농민운동·노동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현대]
1945년의 8·15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환희와 함께 혼란과 고통도 아울러 가져다주었다. 진도지역은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온 도민이 환호작약하는 가운데, 일제에 충성을 다해 공출, 징발 등에 앞장서 온 면장이나 밀정 행위를 한 자 등을 징치(懲治)하는 등의 행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경이 되면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진도군 지부가 결성되자 곧바로 인민공화국수립이 선포되었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바로 인민위원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진주한 미군사령부가 군정을 포고하면서 이를 불법단체로 간주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고, 주된 활동 인사들은 지하로 잠적하였다. 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한국민주당 등의 진도군 지부 등이 속속 결성되면서 진도도 해방 후의 어느 공간이나 마찬가지로 좌·우익 간의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해방 이후 정국의 숨 가쁜 격랑을 넘어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새로운 제도와 질서가 수립되어 가던 중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처참한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1950년 8월 31일에 전라남도 해남군의 우수영으로부터 약 1개 소대 병력의 북한군이 상륙하여 진도를 접수하였다. 이후 10월 5일 철수했던 경찰 병력이 다시 진군해 와 진도를 수복하였고 북한군 및 그의 협조 세력들은 많은 수가 섬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50여 일간 진도군내에서는 좌·우익 양 세력이 서로를 해치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유혈극이 일어났다. 1951년에 황해도 장연군·송화군 출신의 피난민 3천 여명이 정착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진도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 경제개발에의 참여, 교육 및 사회시설 등의 확충, 문화의 전승 및 육성 등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