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31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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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同友會事件加擔者珍島流配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주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8년 1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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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8년 1월 17일![]() |
발생|시작 장소 | 동우회 사건 -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민종식|박재홍|조규현|양문순|이승대|최익진|서창보|이광수|윤충하|김영래|최동식|권재중|정인국|이기|윤주찬|오기호|김인식|서정희|김한긍|김학석|조순종|강준영|최원호|김재붕|이필상|여규면|이근우|동우회 |
[정의]
1907년 고종의 폐위에 저항하여 일어난 동우회 사건으로 전라남도 진도에 유배 온 사람들.
[개설]
동우회는 1907년 6월 홍재칠, 이윤용, 윤이병, 이범규가 발기하여 서울에서 창립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사무소는 서울 중곡동에 두었고, 서울 5부(五部)에 지부를 두었다.
[역사적 배경]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알려지자 그해 7월 12일 일본이 고종을 퇴위시키고 외무대신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며, 7월 17일에는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고종에게 일본 도쿄에 가서 일본 황제에게 사죄할 것을 강요하였다.
[경과]
조정 대신들의 이 같은 행위가 알려지자 1,000여 명의 동우회 회원들이 7월 17일에 서울 사무소에 모여 특별 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동우회 회장 윤이병은 고종의 일본행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회원들은 이와 관련한 대신들을 국적(國賊)이라 규탄하였다. 그러나 이틀 뒤인 7월 19일 고종의 양위가 결정되자 다음 날인 7월 20일 동우회 회원들은 석고단에 모인 2만여 군중과 함께 시위를 하였고,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하고 이완용의 집을 불태웠다. 그러나 고종은 이날 끝내 왕위에서 물러났고, 항쟁을 주도한 동우회 간부와 회원 및 일반 민중들이 붙잡혔으며, 이들 중 59명이 1908년 1월 16일과 17일 평리원에서 유배형에 처해졌다.
[결과]
『황성신문』 1907년 11월 15일 자에는 항쟁을 주도한 사람들 중 39명이 유배형을 받았다고 나오고, 1908년 1월 24일 자에는 20명이 추가로 유배형을 받았다고 나온다. 전라남도 진도군 27명, 전라남도 지도군 30명, 황해도 황주군 2명 등 모두 59명이었다. 『황성신문』 1907년 11월 15일 자에는 진도로 유배된 18명 중 민종식·박재홍·조규현·양문순은 종신형, 이승대·최익진·서창보·이광수·윤충하·김영래·최동식·권재중은 10년 형, 정인국·이기는 7년 형, 윤주찬·오기호·김인식·서정희는 5년 형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이후 『황성신문』 1908년 1월 24일 자에는 김한긍, 김학석, 조순종, 강준영, 최원호, 김재붕, 이필상, 여규면, 이근우 등 9명이 진도로 유배되었다고 나온다.
[의의와 평가]
을사조약이 일방적이고도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음을 만방에 알리고 무효를 관철하려던 주장이 좌절되는 과정에서 동우회 중심의 투쟁과 피해가 뒤따랐으나 동우회 사건은 일제 강점기 초 항일운동의 좌표가 되었다.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진도로 유배 온 사람은 27명이나 되었지만 이필상밖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없다. 이필상은 10년 형을 선고받고 진도에 왔다. 1908년 11월에 진도를 탈출하여 해남과 진도를 오가며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1909년 1월 해남 개초리 부근에서 체포되었고, 다시 탈출하다가 사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