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
-
○ 성여신(成汝信) : 자는 공실(公實)이요, 호는 부사(浮査)며, 우윤(右尹) 성두년(成斗年)의 아들이니 가정(嘉靖) 병오년(명종 1년, 1546)에 나서 만력(萬曆) 기유년(광해군 1년, 1609)에 생원과 진사의 두 시험에 합격했다. 일찍이 남명(南冥)과 구암(龜巖)의 두 문하에서 유학하여 경의(敬義)의 지결(旨訣)을 얻어듣고 종신토록 마음에 깊이 새겼다. 서책은 읽지 않은...
-
○ 하륜(河崙) : 고려 말에 과거에 합격해 중앙과 지방에 역임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질이 있었다. 태종(太宗)을 도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이 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했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했다.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하연(河演) : 하윤원(河允源)의 손자이다. 과거에...
-
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선비정신에 관한 설화. 남명 조식 설화는 1622년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이 완성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 실렸으며, 전통문화연구회가 2001년에 편찬한 『어우야담』에 국역하여 다시 수록하였다. 남명 조식은 두류산(현 지리산)의 산천재(山天齋)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명망이 높았고, 이에 여러 차...
-
조선 중기 영남사림으로서 남명학파를 이룬 성리학자 조식. 조식(曺植)의 생졸년은 1501(연산군 7)~1572(선조 5)이며,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이며, 남명은 그의 호이다. 어떤 위대한 인물이 역사에 출현하는 데에는 역사적 전통과 지리적 특성이 바탕이 된다. 남명 역시 조선 초기 이후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이 형성해온 학문적 연원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경상우도(慶尙...
-
조선 후기의 선비. 자(字)는 경보(敬甫), 호는 명암(明菴)·대명처사(大明處士).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고 젊어서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지조가 맑고 고상하였다. 일찍이 과거에는 뜻을 버리고 아름다운 산수를 사랑하여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녔다. 두류산의 무이곡(武夷谷)에 들어가서 와룡암(臥龍菴)을 세우고 제갈무후...
-
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경직(敬直), 호는 백곡(栢谷). 청백리 진유(陳猷)의 증손이다. 아버지 부제학 진식(陳寔)이 간신 김안로(金安老)의 죄를 극언하고 화를 피하여 진주로 내려왔다. 원래 진식은 진극경의 당숙이며, 생부는 생원 진정(陳定)이다. 효자로 이름을 남긴 진인(陳寅)의 아버지이다. 1546년(명종 1) 진주 백곡촌에서 태어나 마동에서 살았다. 약...
-
진주시 판문동에 있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댐과 남강댐에 의해 생긴 인공호수. 진주를 흐르는 남강의 근원은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는데 경호강이라 부르며, 다른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덕천강으로 부른다. 이 두 강이 진주 시내 서쪽 광탄(光灘)[너우니]에서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 제방을 쌓고 사천만으로 방수로를 뚫어 남강 하류의 홍수를 방지하자는 주...
-
조선 중기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진주의 사찬(私撰) 지리지. 지리지는 수록된 공간 범위에 따라 전국지인 여지(輿誌)와 지방지인 읍지(邑誌)로 나눌 수 있다. 또 지리지를 편찬한 주체에 따라 국가기관에서 만든 관찬(官撰) 지리지와 개인이 편찬한 사찬 지리지로 나누어진다. 전국 단위의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된 읍지는 전국 지리지인 『동...
-
진주지역의 농업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물을 공급하는 시설. 조선시대에는 덕천강 유역에서 수전농업(水田農業)이 크게 발달하였다. 적어도 덕천강 유역의 농업지대는 진주지방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을 것이다. 그래서 진주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적 사건과 활동을 해석하는 데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에 대한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조선 초기에 남명 조식(曺植)이 덕천강 상류 덕산에...
-
조선 후기의 학자 문상해(文尙海)[1765~1835]의 문집. 문상해는 진주 독천리(禿川里)에서 출생하고, 호를 창해(滄海)라고 했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스스로 육영재(育英齋)를 찾아가 학문에 정진할 만큼 학구열이 높았다. 성격은 온화하면서도 엄격해 친구들에게 신의가 있었으며, 후학들에게는 학문을 권장했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김면운, 박대순, 이견 등과 교우를 가졌다. 만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