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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593
한자 朝鮮時代
영어음역 Joseon sidae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동희

[정의]

1392년 조선 건국에서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전라북도 남원 지역의 역사.

[연혁]

현재의 남원은 조선시대 남원도호부와 운봉현이 통합된 것이다. 남원부는 조선 건국 후인 1413년(태종 13) 남원도호부로 바뀌었으며, 운봉현남원부의 속현으로 있다가 조선 건국 후인 1392년(태조 원년)에 독립되었다.

이후 남원도호부는 1739년(영조 15) 양찬규(梁纘揆)의 반란으로 인하여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750년(영조 26)에 다시 남원부로 복구되었다. 1844년(헌종 10)에도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53년(철종 4) 다시 남원부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 남원도호부와 운봉현은 다른 모든 고을과 마찬가지로 군으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지방제가 23부제로 개편되면서 전라도가 전주부·남원부·나주부·제주부 등 4부 체제로 재편되어, 남원부에서 남원·구례·운봉·곡성·순천·광양·임실·장수·진안·담양·순창·옥과·창평·용담·무주 등 15개 군현을 관할하였다.

1896년(고종 33)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남원군과 운봉군은 각각 1등군과 4등군으로서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전북의 1등은 전주와 남원, 2등은 고부·김제·태인, 3등은 여산·금산·익산·임피·금구·함열·부안·무주·순창·임실·진안, 4등은 진산·만경·용안·고산·옥구·정읍·용담·운봉·장수·구례였다.

남원부의 임내 속현 관련을 보면, 조선 건국 후 남원부의 임내 속현이던 구고현(九皐縣)[임실군 청웅면·운암면·강진면·덕치면 지역]이 1394년(태조 3) 임실현의 임내로 이속되었다. 1409년(태종 9)에는 전라도의 모든 임내를 직촌화하는 조치에 따라 남원부의 속현인 거령현(居寧縣)과 25개의 속향·속소·속부곡이 직촌으로 병합되었다.

그리하여 남원부의 임내일망정 엄연히 하나의 고을이었던 26개의 현·향·소·부곡이 없어지고 남원부와 함께 27개의 고을이 하나의 고을로 통합되었다. 1906년(광무 10)에 칙령 제49호로 전국의 모든 월경지(越境地)와 두입지(斗入地)가 정리되었는데 남원군은 무려 15면 232리가 이웃 군으로 옮겨짐으로써 관할 구역이 대폭 줄어들었다.

[정치와 군사]

남원도호부에는 종3품인 도호부사, 종5품 판관, 종6품 교수가 각각 1인씩 배치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향교의 교육 기능이 유명무실해지고, 판관도 처음에는 목(牧) 이상의 고을과 거진(巨鎭) 급의 도호부에 다수가 설치되었으나 뒤에는 관찰사가 수령을 겸한 고을, 예컨대 전주부·공주목·대구도호부 등에만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남원부에 도호부사 1인만이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1895년 23부제가 실시되면서 남원부에 관찰사가 배치되어 15개 군현을 관할하였다. 남원부의 속현이던 운봉현은 조선 건국 후인 1392년(태조 원년) 독립되어 감무(監務)가 두어졌다. 이후 현감으로 바뀌어 현감·훈도 각 1인이 운봉현에 임용되었으나, 점차 훈도의 역할이 상실되어 감에 따라 현감만이 임용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

조선 초 군제는 고려의 계수관제가 이어졌는데, 전라도의 경우 4계수관 체제였으며 그 중 하나가 남원도호부였다. 그리하여 남원도호부에 순창군·용담현·구례현·임실현·운봉현·장수현·무주현·진안현·곡성현·동복현·광양현이 속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이르러 진관제(鎭管制)가 실시되었으며, 남원도호부는 거진의 하나로 1도호부·1군·9현 등 11읍을 관할하였고, 남원도호부사는 남원진병마첨절제사를 겸하였다. 관할 군현은 담양도호부와 순창군을 비롯하여 임실·무주·곡성·진안·용담·옥과·운봉·창평·장수 등 9개 현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진영제가 마련되었는데, 각 도의 경우 전·후·중·좌·우 5영으로 편제되었으며, 정3품인 진영장은 도적을 잡는 직책인 토포사를 겸하였다. 그 결과 1654년(효종 5) 남원부에는 전라도 좌영이 설치되어 좌영장겸토포사(左營將兼討捕使)를 두었다가 1708년(숙종 34)에는 좌영이 운봉으로 옮겨져 운봉현감이 영장을 겸하였다.

[사회와 경제]

남원은 조선시대 전북 일원을 대표하는 양반 고을로 가장 많은 유학자·관리·의병 등을 배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가장 많은 선현들의 문집이 간행된 곳으로도 이야기되고 있다.

조선 초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남원부에는 토성이 양(梁)·정(鄭)·진(晉)·윤·양(楊)·견·황보·염·배·유(柳)·황 등 11개이고, 속성(續姓)이 이·임(林)·송 등 3개, 속현인 거령(居寧)의 성이 백·장·한·가(哥)·황 등 5개이다. 운봉현의 토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박·정(鄭)·문·전(田)·신(辛) 등 5개 성이 나와 있다.

1871년경에 간행된 『호남읍지』 「남원편」에 보면, 조선말 남원부에 분포한 성씨가 총 47개로, 남원양(梁)·동래정·남원진·남원양(楊)·남원이·남원윤·장수황·파주염·성주배·문화유·장흥고·천안전·나주임·순흥안·여산송·창령조·삭령최·수원백·청주한·흥덕장·경주김·함양오·진주소·장연변·풍천노(盧)·강화노(魯)·밀양박·청송심·남양방·단양우·달성서·나주진(陳)·평산신·순창조(趙)·안동권·진주하·밀양손·장흥마·연안차·창녕성·양천허·창원정(丁)·평강채·협천태(太)·진주형·원주원(元)·남양홍 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 남원도호부의 호수는 1,300호, 인구는 4,912명이었으며, 운봉현의 호수는 139호, 인구는 551명이다. 1765년(영조 41)에 『여지도서』에 의하면 남원부의 호수는 10,782호, 인구는 36,306명(남 19,095명, 여 17,211명)이며, 운봉현은 2,024호에 4,823명(남 2,602, 여 2,221)이었다.

촌락 구성은 18세기 『여지도서』와 1789년(정조 13)의 『호구총수』에는 남원이 47방으로 되어 있으며, 1864(고종 1)의 『대동지지』에는 48방으로 되어 있다. 전답은 조선 초기의 경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남원부가 간전(墾田) 12,508결, 운봉현이 간전 1천 7백 96결이다.

조선 후기의 경우는 1871년경에 간행된 『호남읍지』에는 한전(旱田) 2,880결 35부 2속, 수전(水田) 7,180결 23부 2속으로 나와 있으며, 운봉현은 시기전(時起田)이 1,495결 54부 7속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 초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하는 남원부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목화·닥나무·감·모과·칠(漆)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여우가죽·삵괭이가죽·족제비털·칠·석류·대추·감·배·지초·표전지·자리요, 약재가 새앙·쥐엄나무열매·녹각상·장군풀·복령·곰쓸개·매화열매·당귀·밀·연밥송이·겨우살이풀뿌리·패랭이꽃이삭·모란뿌리껍질·심황·인삼이다. 토산(土産)은 은어다. 자기소가 1, 도기소가 2 곳 있었다.

운봉현 토의는 오곡과 뽕나무·삼이요, 토산은 송이다. 토공은 꿀·밀·족제비털·칠·오미자·석이·감·삵괭이가죽·가뢰·자리요, 약재는 녹각상·등에·흰바곳·복령·복신·오갈피·겨우살이꽃이다.

[교통과 통신]

조선은 건국 후 고려의 역제를 계승하여 전국에 543개 역을 두고 이를 41도(道)로 나누었다. 역은 공문서의 전달·관리의 왕래와 숙박·관물의 수송을 돕기 위한 것으로, 각 도에는 종6품 찰방(察訪), 또는 종9품 역승(驛丞)을 두었으며, 각 역에는 말과 역리와 역졸 등을 배치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40도 546개 역으로 개편하는데, 전라도는 삼례도·제원도·오수도·청암도·경양도·벽사도 등 6개도로 편제되었다. 이 중 삼례도·제원도·오수도가 오늘날의 전라북도에 속하였는데, 남원도호부와 운봉현은 오수도에 속하였다.

원(院)은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로서 각지의 요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두었는데, 조선초에는 수백 개의 원이 있었으나 이용자가 국한되어 있어 점차 쇠퇴하여 폐쇄 소멸되는 곳이 많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전라도에만 245곳의 원이 있었으며, 남원도호부에는 안신·호산·금천·신원·비홍·서림·순자·다시천·운제·천원·축천·홍화·율두천·원처 등 14곳, 운봉현에는 여원·중흥·대공 등 3곳의 원이 있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6.16 인명 오류 수정 찬규(攢揆) -> 양찬규(梁纘揆)
이용자 의견
류** 위 연혁 항목의 기사에서 "찬규(攢揆)의 반란"이라고 하였으나, 실록에는 양찬규(梁纘揆)로 나옵니다.
  • 답변
  • 디지털남원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의견을 반영하여 해당 오류를 수정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7.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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