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도 602호선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있는 조선 후기 김자건의 묘비. 김자건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시문에 뛰어났으며 서예가였다. 자는 이계이고, 광산인이다. 좌찬성 김극복의 후손으로 김덕린의 아들이다. 1656년(효종 7)에 재학으로 추천되어 선공감역 빙고별감을 지냈으나 효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산수를 벗삼아 초야에 묻혀 살았다. 가야곡면사무소에서 지방도 602호선을 따라 동...
-
시묘리는 시묘천을 따라 이어지는 지방도 602호선의 양쪽에 골짜기마다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물길 방향인 남동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보면 시묘2리, 시묘1리, 시묘3리, 시묘4리의 순서로 이어진다. 시묘리는 4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구자곡면 시절에는 하나의 마을이었다가 구자곡면이 1936년 연무읍으로 승격되면서 시묘리는 은진면으로 편입되었고, 이때 인...
-
시묘4리의 버들골 골짜기 안쪽의 좁고 깊숙한 곳은 일명 ‘일천다랭이골’이다. 다랭이 논이 어찌나 길게 이어지는지 천 개나 된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하늘에서 비 내리기만 기다리는 천수답이었으므로 깊고 경사진 골짜기에 수십 개의 층계를 만들어 벼를 심고 흘러내리는 물을 활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오죽하면 ‘천개’라고 했을까. 그 이름만으로도 험한 산골을 일구며 살았던 옛...
-
시묘리는 4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4개리는 하천과 골짜기로 구분된 채 지방도 602호선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시묘1리는 가야곡면 야촌리와 경계를 이루는 관청산(觀淸山)에 기대어 있고, 마을 앞의 시도(市道) 4호 도로 건너편 배매산 아래에 시묘2리가 있다. 여기에서 도로를 따라 서쪽 은진면 방향으로 1.3㎞를 가면 도로의 우측인 북쪽이 부수골...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있는 부여서씨의 재실. 부여서씨 재실은 가야곡면 삼전리에 주로 세거하고 있는 부여서씨 종중에서 건립한 재실이다. 건축 연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재실 아래쪽 영모재(永慕齋)가 1967년에 건립되었고, 숭효재는 이보다 앞서 건립되었다는 사실로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가야곡면사무소에서 지방도 602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500m 정도 가서...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열의 묘표. 1694년(숙종 20) 당시 논산시 가야곡면의 대표적 세거성씨인 부여서씨 인물 중 판관을 지내고 통례원 벼슬을 지냈던 서열의 묘소 앞에 있던 비석이 너무 오랜 시간 비와 바람에 의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서열의 10세손 서경조가 부여서씨 후손들과 상의하여 자금을 모...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서익의 묘갈. 1672년(현종 13) 서익의 묘소 앞에 세워져 있는 묘갈로 서익의 행적이나 업적, 관직 등 서익 개인에 관련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후손들에 대해 자세하게 적고 있다. 육곡리에 위치한 가야곡면사무소에서 지방도 602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500m 정도 가서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지방도 643호선을 따라...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정수의 묘표. 서정수 묘표는 논산시 가야곡면의 세거성씨인 부여서씨 중 가야곡면에 처음 입향한 입향조 서정수(徐貞壽)의 묘 앞에 세운 묘표로서, 1694년(숙종 20)에 후손인 서경조(徐敬祖)가 세웠다. 비명은 서정수가 찬(撰)하고 서(書)하였다. 가야곡면사무소에서 지방도 602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난 육곡교를 건넌 후 북쪽으로 향...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서필원의 인정비. 서필원 인정비는 서필원이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다시 대사성이 되어 전라도를 떠나자 지역 백성들이 건립한 것이다. 서필원의 공적을 살펴보면, 1659년(효종 10)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봉록을 내어 백성을 구휼하고, 소 전염병이 돌아 경작이 어려울 때에는 다른 도로부터 소를 얻어 나누어 주었다고 한...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있는 조선 중기 진진 처 담양국씨의 정려. 담양국씨는 진진의 부인이다. 임진왜란 일어나자 왜적은 논산의 가야곡까지 몰려 들어왔고, 마을 사람들은 앞산에 나가 농기구를 가지고 왜적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총칼이 없는지라 모두 후퇴하게 되었는데, 이때 국씨도 남편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왜적이 점차 가까워 오자 국씨 부인은 남편에게 꼭 살아서 부모님과...
-
일제강점기는 그 어느 때보다 고생스러웠다. 일제의 수탈은 사람들의 삶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장 풍요로워야 할 가을 추수 때에는 일부러 달빛도 없는 한 밤을 틈타 쌀을 짊어지고 옮겼는데 혹시 낮에 들고 다니다가는 뺏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강제적으로 토지측량을 벌였고, 지적도에 소유자 명을 쓰라 하였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