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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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興里山城 |
영어의미역 | Sinheungri Sanseong Mountain Fortress |
이칭/별칭 | 모촌리 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모촌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서정석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모촌리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
[개설]
신흥리 산성은 모촌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모촌리 산성으로 부르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신흥리 산성으로 알려져 온 만큼 혼란을 피하기 위해 그대로 신흥리 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위치]
연산사거리에서 남쪽으로 난 지방도 697호선을 타고 약 6㎞ 정도 가면 양촌면 모촌리 곰내마을에 이른다. 신흥리 산성은 곰내마을의 뒤쪽에 솟아 있는 해발 163m의 토성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산성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지맥의 서남쪽 끝에 자리한다. 서쪽과 북쪽 및 남쪽으로는 전망이 좋은 편이나 동북쪽으로는 시야가 막혀 있다. 산성의 성벽 바깥쪽으로는 백제 최대의 수혈식 석곽묘군인 모촌리 고분군이 자리한다.
[형태]
신흥리 산성이 자리한 토성산은 정상부가 동북-서남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그 양 끝에서 가지능선이 동쪽과 동남쪽으로 이어진다. 신흥리 산성은 이 두 개의 가지능선과 그 사이의 계곡부를 에워싸면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전체적인 평면형태는 ‘ㄷ’자형을 이룬다.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는 서북쪽은 산봉(山峰)의 거의 정상부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ㄷ’자형 평면형에서 입구가 터진 동남쪽은 정상보다 약간 아래쪽으로 계곡을 따라 축조되었다. 이러한 형상은 고대 산성의 평면형태에서는 특이한 모습이다.
성벽은 1~2단의 할석으로 축조된 기저부를 제외하면 전체가 순수한 토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은 대부분 이미 붕괴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다만, 남서벽의 경우 정상부에 가까운 능선의 둘레를 안쪽에서 삭토하여 외부에 쌓는 방식으로 축조했기 때문에 안쪽에 5~10m 너비의 회곽도(廻郭道)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북쪽 산봉 정상부는 산성 안에서 가장 넓은 평탄면을 이루는 곳으로 대부분의 지역에 민묘가 자리하고 있다. 남동쪽 성벽 일부는 최근에 통신회사의 기지국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과 관련된 부대시설로는 성문터·건물지·장대지(將臺址) 등이 있다. 성문터는 지표 조사만으로는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으나 지형적으로 볼 때 남쪽·남서쪽·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 평탄 지역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내부 면적이 협소하다는 느낌은 없다. 평탄 지역은 모두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산봉의 정상부는 주변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장대지로 추정된다.
[현황]
신흥리 산성은 현재 성벽의 대부분이 이미 붕괴된 상태다. 성 안에서는 다수의 백제토기편이 발견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흥리 산성은 탄현의 후보지 가운데 하나인 전라북도 완주로 통하는 인천천(仁川川)의 서쪽 끝단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황산벌전투와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져왔다. 황산성·황령산성·곰티산성·산직리 산성 등과 더불어 황산벌 주변에 자리하여 신라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흥리 산성은 계백장군이 설치했다는 3영(營) 가운데 우군영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반면에 성벽 조사에서 출토된 토기편을 근거로 한성시대에 백제가 이 지역을 영역화하고 통치하기 위해 방어시설을 구축한 것이 모태가 되어 그 이후 어느 시기에 현재와 같은 토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산성의 정확한 축조 시기와 성격은 발굴 조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