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599 |
---|---|
한자 | 獨立運動 |
영어의미역 |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은지 |
[정의]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민족 운동.
[개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이라 함은 조선 말기 외세의 침투에 대항하여 이루어졌던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으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주권 회복을 위해 전개했던 일련의 반외세·항일운동을 의미한다. 이 시기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독립운동은 주로 독립만세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독립만세운동]
거족적인 3·1운동과 더불어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도 1919년 3월에만 논산읍, 강경읍, 연산면 등을 중심으로 많은 주민이 참여한 여러 차례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같은 해 4월 1일에도 은진면을 중심으로 횃불만세운동이 일어났을 정도로 당시 논산 지역의 독립운동은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농민운동]
일제강점기 전반 논산 지역은 농민운동은 삼남 지역에 비해 비조직적이었으며 활발하지 못하였다. 타 지역과는 달리 논산 지역에서는 군 단위의 합법적인 농민조합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작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할 경우 전적으로 개인적인 노력에만 의존했을 뿐 조직적인 저항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논산 지역 대지주들은 지주회나 조선농회, 총독부 등의 지원을 받으며 유리하게 소작 문제를 풀어갈 수 있었다.
1923년 봄 경성 지주 윤덕영의 토지에서 발생한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1924년 봄 유성 거주 지주 심재후의 토지에서 발생한 악사음의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1926년 봄 부적면 부황리 지주 김명수의 토지에서 발생한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등이 발생했을 때도 논산 지역의 소작 농민들은 지주와 마름의 횡포에 대한 저항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지 못하였다.
이후 논산 지역의 농민운동은 합법적인 농민조합인 노성농조의 창립과 더불어 다소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12월 상월면 대명리 농민야학 회관에서 창립된 노성농조는 1927년 3월 대명농조로 개칭되면서 같은 해 12월에 열린 정기총회에서 조선농민총동맹에의 가맹, 대명 농민야학에 대한 후원, 조합원의 계급의식 각성 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회원 수는 1929년 1월 현재 83명에 불과했다.
한편 당시 논산 지역에는 대명농조 외에도 채운면과 성동면에 면단위 농민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중 성동농민회는 1928년 봄 소작권 이동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일부 지주와 악사음을 직접 방문하여 경고하거나 경고문을 발송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논산 지역의 혁명적 농민운동은 합법적인 농민조합의 결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양촌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1932년 5월경 경찰이 머슴계 설립을 불허하자 70여 명의 양촌면 농민들이 적기 시위를 감행하였으며, 경찰이 출동하여 동지들을 검거하자 동지 방면을 위한 투쟁까지 전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양촌면 지역에서는 머슴을 잃고 폐농 지경에 이른 지주가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모두 19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들 중 권영민과 이지용을 포함한 총 10명이 치안유지법 위반 및 공무집행방해죄로 1933년 2월 28일 공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노동운동]
농민운동에 비해 논산 지역의 노동운동은 강경노동조합과 강경고용인친목회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비교적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강경노동조합은 1910년에 결성된 하역노동자들의 조합으로 1925년경에 이르러 조합원 수가 2~3천 명에 달하고 하루 2천여 척의 하역 작업을 처리할 수 있는 대규모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강경노동조합은 일제의 지원을 받는 자본가들에 대한 투쟁보다는 조합 내 내분으로 인한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예를 들면 1930년 정월 초에 강경 지역의 하역 노동자들 수백 명이 신구 노조원으로 갈리어 집단적인 패싸움을 벌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십 명의 노동자가 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관련자 3명이 검사국에 송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충돌은 1930년 4월 강경하주조합의 주선으로 다시 결합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한편 1920년대 중반 논산과 강경 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상점 점원들을 회원으로 하는 일종의 노동조합에 가까운 논산고용인친목회와 강경고용인친목회가 조직되어 야학을 운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중 강경고용인친목회는 1925년 5월 조선일보 강경지국에서 경찰의 엄중한 경계 속에 창립되었는데, 당시 회장은 우호경, 총무는 박석규 등이었으며 회원 수는 대략 200여 명 정도였다.
강경고용인친목회는 창립총회부터 ‘국제노동자 만세, 무산자 만세’ 등의 구호를 제창하여 경찰로부터 집회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창립 직후에 있었던 단오놀이 행사로 야유회를 진행하여 하시장에 운집한 뒤에 적기를 휘날리며 ‘강경고용인친목회 만세’를 고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는 임시총회를 열고 임원을 교체함과 동시에 강령도 채택하였다. 논산고용인친목회는 1926년 1월 논산읍내에서 조직되었다. 그 외 당시 논산면 지역의 7개 노동단체들이 1929년 3월 논산노동조합을 조직하였으나, 소속 단체들 간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인한 갈등과 경찰의 탄압 및 1930년대의 집회·결사의 자유 제한 조치 등으로 인해 활동은 미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