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면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리에 속하는 마을. 골계[谷溪]란 비파산의 양쪽 산허리에 돌이 깨어져 골이 나 있는 것을 보고 ‘돌이 깨어져 골져 있는 곳’이라 하여, ‘골계’라 불렀다 한다. 그런데 골계만은 비파산이 쑥 나와 이를 사이에 두고 남·서로 골짜기가 둘이 있고, 두 골짜기에서 냇물이 흘러내리고 있어 다른 동리보다도 골짜기와 시내가 많다고 해서 골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고,...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서2리에 속하는 마을. 구암초등학교가 있던 곳의 바닷가 뱃자리 뒤에 산이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 있고 거기에는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굴이 있다. 개척 때 사람들이 이곳에 와 보고 석산에 굴이 있다고 해서 굴바우라 부르게 되었고, 한자로는 굴암(窟岩)이라고 하던 것이 오늘에는 구암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2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당시 이 섬에는 깍새가 많이 있었는데, 특히 이곳 등성이에는 깍새가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깍새가 많은 등성이라는 뜻에서 깍새등이라 부르다가 산등성이의 모양이 깎아놓은 듯 가파르다고 하여 지금은 깍깨등이라 부르고 있다. 1884년(고종 21) 울릉도 개척 정책에 따라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에 와 도방청을 두었으므로 도방 또는 도...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서1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민들이 이 곳에서 나팔을 불어 일꾼들을 모았다고도 하며, 또는 나팔 모양으로 생긴 등성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도수(島首) 배상삼(裵尙三)이 암살당하던 날, 이곳에서 나팔 소리가 여러 번 났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설 등도 있다. 본래 남면 지역인데,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서리에 속하는 행정리. 마을의 이름은 남양리의 서쪽이 되므로 남서리가 되었다. 본래 남면 지역인데, 1906년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 등 5개 동과 북면의 태하·학포 등 2개 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설치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면과 구암을 병합하여 남서동[현 남서리]으로 개편하였다. 그 뒤 남서동을 2개 구로...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서리에 속하는 행정리. 남서리는 남양리의 서쪽이라 하여 불렸는데, 남서천 서측의 대등[566.1m]을 넘어서면 남서2리가 된다. 본래 남면 지역인데, 1906년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 등 5개동과 북면의 태하·학포 등 2개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설치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면과 구암을 병합하여 남서동[현 남서...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리에 속하는 행정리. 남양리는 원래 골계의 일부였으나 행정구역을 편제할 때 2개로 나누어 하나는 남양리라 하고, 하나는 남양리의 서쪽이라 하여 남서리라 하였다. 본래 남면 지역인데, 1906년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 등 5개 동과 북면의 태하·학포 2개 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새로 설치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리에 속하는 행정리. 남양리는 원래 골계의 일부였으나 행정구역을 편제할 때 2개로 나누어 하나는 남양리라 하고, 하나는 남양리의 서쪽이라 하여 남서리라 하였다. 그리고 석문동은 평지이면서 삼면이 성을 쌓아놓은 것과 같은 모양이다. 다만 입구에 서쪽으로 뻗어 있는 큰 바위가 문을 세워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석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 남면 지역인데,...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리에 속하는 행정리. 남양리는 원래 골계의 일부였으나 행정구역을 편제할 때 2개로 나누어 하나는 남양리라 하고, 하나는 남양리의 서쪽이라 하여 남서리라 하였다. 본래 남면 지역인데, 1906년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 등 5개 동과 북면의 태하·학포 2개 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새로 설치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1882년(고종 19)에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면서 주민이 입도하기 시작하여 이곳에 자치지휘소를 설치하고 도방청이라 불렀다. 그 이후 이규원의 일기에서도 도동을 도방청포구(道方廳浦口)라 기록하고 있으며, 도방청은 번화한 곳을 가리켰으며, 이후 도방청의 도(道)자를 따서 도동(道洞)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태하에 있던 군청이 191...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2리에 속하는 마을. 소를 잡는 도축장이 있었던 동네라 도치장 또는 도축장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태하에 있던 군청이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저동과 사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동이라 하여 남면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뒤쪽은 보루산의 자락과 닿아 있다. 도동 선착장에서 울릉초등학교와 KT울릉지점을 지나 사동으로...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2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초기 전라도 사람들이 이곳에서 배를 만들 나무를 베기 위해서 막을 치고 있었다고 해서 막동(幕洞)이라 하였다. 본래 남면 지역인데,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 등 5개 동과 북면의 태하·학포 등 2개 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설치하였고,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통구미·석문·골...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2리에 속하는 마을. 말바우는 생김새가 말이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물이 흘러내릴 때는 마치 말이 오줌을 누듯이 떨어진다고 해서 이와 같이 붙여진 이름이다.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의 5개 동과 북면의 태하·학포의 2개 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새로 설치하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
경상북도 울릉군 주민들이 공유하는 행동 양식과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결과물. 울릉도 문화는 울릉도라는 섬에서 축적된 모든 역사를 함유한 것이다.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면서 울릉도가 우리 역사로 편입된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 역사는 1882년(고종 19) 개척령 이후의 짧은 역사만을 흔히들 기억한다. 그러나 울릉도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했고 신...
-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행정구역. 석포동 남쪽 산등성이를 타고 남서쪽으로 올라가서 이 섬의 최고봉인 성인봉을 거쳐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타고 내려가서 태하령과 노인봉을 지나 태하동, 말바위와 남서동 물칭칭 사이 산 끝까지를 경계로 하여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면이 되었다. 1900년 10월 25일 군제를 실시하면서 남면과 북면으로 나누어지고, 북면에는 석포·천부·신리·평리·...
-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리에 있는 북면 관할의 행정 기관.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의 행정과 민원 및 주민의 복리 증진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00년 군제를 실시하면서 섬의 최고봉인 성인봉과 태하령을 중심으로 남쪽을 남면이라 하고, 그 북쪽을 북면이라 하였다. 당시 북면은 석포·천부·나리·평리·현포·태하·학포의 7개 동을 관할하였다. 1906년 행정구역이 다시...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이 마을은 예로부터 옥과 같은 맑은 모래가 바닷가에 가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곳 지명을 ‘옥같은 모래가 누워 있다’는 뜻에서 와옥사(臥玉沙)라 불렀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려지는 동안에 어느덧 와옥사(臥玉沙)가 와록사(臥鹿沙)로 변하였고, 뒤에 한자식 이름으로 표기될 때 사(沙)만 취하여 사동(沙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와록사...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이곳은 나무도 울창하고 평지가 있어 농사짓기에도 알맞아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데, ‘산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평지’라는 의미로 안평전[內平田]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옥천동(玉泉洞) 또는 우복동(牛伏洞)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이 산등성이가 마치 소가 엎드려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황무지였는데, 1884년...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울릉읍과 서면의 면계에 마치 큰 배의 앞부분을 엎어놓은 듯한 산이 바다에 솟아 있다. 이 동리는 신리나 죽영보다 더 산의 끝 쪽의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갓영·갓령[邊嶺]이라 불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간령(間嶺)·간영이라 불려지고 있다. 금강원 아래 마을에 사람들이 점차 많이 살게 되자 우복동 일부와...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2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당시 삼막골에는 괴목나무가 유난히도 많았는데, 일본 사람들이 배를 만들기 위해 이 곳에 막을 쳐 놓고 벌목을 했다고 하여 산막이라 하였다. 산삼을 캐기 위해 막을 쳤다고도 하고, 또 삼베옷을 만들기 위해 막을 쳐 놓고 삼을 많이 심었다고도 해서 삼막골이라고도 하였다. 태하리는 1882년 개척령이 반포되자 최초로 이주해 온 주민들의...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1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초에 이 곳에 온 사람들은 삼 열매, 깍새, 바다고기 등을 먹고 사는 아주 곤궁한 생활을 하였다. 어느 해인가 높은 산 중허리가 무너져 내려오다 해변 200m에서 멈추면서 평지가 되었는데, 그 뒤 그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새각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1884년(고종 21)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1리에 속하는 마을. 예전에 이곳에 서달래(徐達來)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해서 그 이름을 따서 서달령이라고 하였고, 지금은 서들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하리는 1882년 개척령이 반포되자 최초로 이주해 온 주민들의 본거지로 1902년까지 울릉도의 행정 중심지였고 울릉도에서는 본래의 토속적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행정구역. 저동(苧洞) 와달리(臥達里) 북쪽 산등성이를 타고 남면 쪽으로 올라가서 최고봉인 성인봉을 거쳐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타고 내려가서 태하령을 지나 태하동[현 태하리]의 말바위와 남서동[현 남서리]의 물칭칭 사이 산 끝까지를 경계로 하여 그 서쪽을 서면이라 하였다. 1906년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 등 5개...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리에 있는 서면 관할의 행정 기관.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의 5개동과 북면의 태하·학포의 2개 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새로 설치하였으며, 1914년 군면 통폐합에 의해 통구미·석문·남양과 남면의 장흥도 일부를 병합하였다. 1960년 8월에 태하동을 2개 동으로 개편하여 7개 행정동을 관할하였으며, 태하1동·...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2리에 속하는 마을. 이 곳은 평지이면서 삼면이 성을 쌓아놓은 것과 같은 모양인데, 다만 입구에 서쪽으로 뻗어 있는 큰 바위가 문을 세워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석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의 5개 동과 북면의 태하·학포의 2개 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새로 설치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3리에 속하는 마을. 이 곳에 사람들이 점차 많이 살게 되자 우복동 일부와 중영 일부를 합해서 새로 된 마을이란 뜻으로 신리라 하였다. 1884년(고종 21)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이 곳에만 모래가 있어서 사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옥천동과 장흥동 일부를 병합하여 사...
-
“육지는 뭘 사면 끼워 주고 이런 거 있잖아요. 우유도 몇 개 이렇게 여기는 어제도 애기가 우유를 먹고싶어 해서 우유 하나 샀는데 날짜가 오늘이면 오늘까지예요. ‘아, 마 사가소’ 그래요. 우리는 육지개념에서는 안 사가잖아요. 여는 사가야 돼.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애기는 먹고 싶은데. 그리고 끼워주고 하는 것 없어요. 물가가 비싸니까 기름값이 남면만 해도 24만4천원. 우리는...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2리에 속하는 마을. 이곳은 나무가 울창하고 평지도 있어 농사를 짓기에 알맞아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데, 산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평지라는 의미로 안평전[內平田]이라 하였다. 1884년(고종 21)에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서 이 곳에만 모래가 있어서 사동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옥...
-
선사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상북도 울릉군의 역사. 울릉도의 경우 일제강점기인 1917년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처음 유물의 채집이 있은 이후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등의 조사가 있었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에 의해 울릉도의 고고학적 조사가 실시되었다. 1947년과 1957년에 김원룡 등에 의해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1963년에 김정기에 의해 보충 조사가 실시되어...
-
울릉읍사무소 는 옛(일제강점기) 울릉군청사가 있던 곳에 자리잡고 있다. 1882년(고종19년)에 울릉도개척령이 반포됨에 따라 울릉도에서는 도장제(道場制)가 실시되었는데, 그 후 9년만인 1900년부터 군제(郡制)가 실시되면서 울릉도를 2개 구역으로 나누는 행정을 실시하였다. 저동 와달리의 북쪽 산등성이를 타고 남서쪽으로 올라가서 성인봉을 거쳐 산줄기를 타고 서쪽...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2리에 속하는 마을. 마을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시냇물과 샘물이 맑고 맛이 좋아 옥과 같다는 뜻에서 옥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884년(고종 21)에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서 여기에만 모래가 있어서 사동이 되었다. 옥천동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04년부터이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옥천동과...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2리에 속하는 마을. 옥 같은 모래가 누워 있다는 뜻에서 처음에 와옥사(臥玉沙)라 불렀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와옥사(臥玉沙)가 와록사(臥鹿沙)로 변하였다는 설이 있고, 마을 뒷산의 모습이 사슴이 누워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와록사라고도 한다. 1884년(고종 21)에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3리에 속하는 마을. 신리에서 산 속으로 높이 올라간 곳에 왜막골[倭幕谷]이란 곳이 있다. 이는 개척령 반포 전후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서 배를 만들기 위한 나무를 베기 위해서 막을 치고 있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1884년(고종 21)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서 이 곳에만 모래가 있어서 사동이 되었다....
-
경상북도 동쪽 바다에 위치한 행정구역. 울릉군은 사면이 바다로 되어 있으며, 대체로 삼각형 형태를 하고 있다. 2009년 12월 현재 인구는 총 4,848세대에 10,398명[남자 5,449명, 여자 4,94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본래 우산국이었는데, 행정 구역의 변천 과정은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 지방 관제로 종래 부군(府郡)의 하부 행정 단위를 면(面)으로 규정...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있는 지방 자치 행정 기관. 울릉군청은 아름다운 국제 관광 휴양 섬 건설을 목표로 미래를 위한 지역 개발, 특색 있는 관광 명소, 신비의 섬 환경 보전, 정이 깃든 사회 복지, 발로 뛰는 현장 행정을 군정 구호로 정하고 업무에 임하고 있다. 경상북도 울릉군의 행정과 자치업무 등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립된 기관이다. 1882년(고종 19) 이규원이 검찰...
-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해 있는 행정구역. 1882년(고종 19)에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면서 도장제(島長制)를 실시하였고, 1900년 10월 25일에는 군제(郡制)를 실시하였다. 저동 와다리[臥達里] 북쪽 산등성이를 타고 남면 쪽으로 올라가서 최고봉인 성인봉을 거쳐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타고 내려가서 태하령을 지나 태하동[현 태하리]의 말바위와 남서동[현 남서리]의 물칭칭 사이...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있는 지방자치 행정 기관. 경상북도 울릉군을 구성하고 있는 1개 읍[울릉읍] 2개 면[서면·북면] 중 울릉읍의 행정 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이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의 행정, 민원 및 주민의 복리 증진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00년 울릉도는 서면과 남면으로 구분되어 현재 울릉읍사무소에 해당하는 남면출장소가 도동, 저동, 사동,...
-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울릉도 역사.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우리나라에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헌병경찰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울릉도의 경우 일본인 나카가와[中川]가 울도군주사로 와서 도민을 다스렸다. 1913년 4월 1일에 울릉도의 하부 행정 단위로 3개면[남면·서면·북면] 9개동[저동·도동·사동·남양동·남서동·태하동·...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저동은 울릉의 개척 당시 이곳 갯벌에 모시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시가 많이 나는 갯벌이라는 뜻으로 모시개라 부르다가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 모시 저(苧)자를 써서 저동이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저동의 중심지인 저동항은 행정명으로 도동3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시가 많이 나는 곳이란 의미의 저동은 저동1리와 저동2리·도동3리...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저동2리는 중간모시개와 작은모시개 일원을 말한다. 중간모시개는 큰모시개와 작은모시개 사이에 위치하며, 작은모시개는 내수전[저동3리] 사이의 저동을 말한다. 이곳은 해변 전면에는 북저바위와 주도(冑島)가 위치하며 서측의 주요 능선에서 급경사를 이루며, 주거지는 주로 도로변과 해변 일대에 형성되어 있다. 저동은 울릉의 개척 당시 이곳 갯...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저동은 울릉의 개척 당시 이곳 갯벌에 모시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시가 많이 나는 갯벌’이라는 뜻으로 모시개라 부르다가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 모시 저(苧)자를 써서 저동이라 하였다. 내수전(內水田)이라고 일컫는 지역은 과거 김내수(金內水)라는 자가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하여, 김내수가 화전하던 곳이란 의미에서 내수전이...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3리에 있는 마을. 정미야골짝은 예전에 정명학이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1917년 「조선지형도」에는 내수전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신흥동을 병합하여 저동이라 하여 남면에 편입되었다. 1961년 남면 조례에 의하여 와달리와 내수전을 합하여 저동3동이 되었다. 1988년 5월 17일 동에서 리로 명칭이 변...
-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울릉도 역사. 울릉도는 고려 말 왜구 때문에 무인도가 되었으나, 조선 초 이래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에 소속되었지만, 이곳이 왜구의 거점이 된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는 쇄환정책(刷還政策), 조선 후기에는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본토로부터 울릉도에 들어간...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1리에 속하는 마을. 뒷산 석벽에 흙이 붙어 있는데, 그것이 마치 주사(朱砂)와 같이 붉다고 해서 이 골짜기를 주삿골이라 하였다 한다. 1917년 「조선지형도」에서는 주사곡(朱砂谷)이라고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저동의 중심지인 저동항은 행정명으로 도동3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시가 많이 나는 곳이란 의미의 저동은 저동1리와 저동2리·도동3리가 공유하고 있...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1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당시 주삿골 등성이가 너무 험준해서 사람들이 오르내리기가 힘들어 산등성이에 줄을 메어 놓고 이를 붙잡고 오르내렸다고 해서 줄맨등이라 불렀다. 일반적으로 저동의 중심지인 저동항은 행정명으로 도동3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시가 많이 나는 곳이란 의미의 저동은 저동1리와 저동2리·도동3리가 공유하고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2리에 속하는 마을. 약간의 경사진 평지가 있어 농사를 경작하기도 알맞고, 또한 사동에서 안평전에 들어가는 중간에 있는 평지라고 해서 중평전(中平田)이 되었다. 1884년(고종 21)에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서 여기에만 모래가 있어서 사동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옥천동과 장흥동 일부...
-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나리에 속하는 행정리. 마치 깎아 놓은 듯이 가파르다고 깍깨등이라 한다. 깎끼등, 깍깨뜽 혹은 추산깍깨등이라고도 한다. 송곳봉[錐山]이란 지명은 현 추산발전소 옆에 삼각형 산의 모양에서 유래한다. 산봉우리가 마치 송곳과 같이 뾰족하다고 해서 송곳산이라고도 한다. 한자식 지명으로 표기하면서 추산이라 하였다. 본래 북면 지역으로 이중식 화산의 분화구인데, 화산회가...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1리에 속하는 마을. 원래 태하에는 황토가 많이 났다고 한다. 지금도 현포 쪽 바닷가 산에 보면 황토를 파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조 때는 이곳의 황토가 나라에 상납까지 되었다고 하고, 또 조정에서 3년에 한 번씩 삼척영장을 이 섬에 순찰을 보냈는데 그 순찰 여부를 알기 위해서 이곳의 황토와 향나무를 바치게 했다고도 한다. 개척...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속하는 행정리. 울릉도 개척 때 사람들이 현 태하리에 와 보니 바닷가 산에 황토를 파낸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큰황토구미라 하였던 것이다. 뒤에 한자식 지명으로 표기할 때 대하(臺霞)라 하다가 다시 태하(台霞)라 표기하였다. 본래 북면의 지역인데, 순종 원년에 서면에 편입되었다. 1906년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 등 5...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속하는 행정리. 울릉도 개척 때 사람들이 현 태하리에 와 보니 바닷가 산에 황토를 파낸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큰황토구미라 하였던 것이다. 뒤에 한자식 지명으로 표기할 때 대하(臺霞)라 하다가 다시 태하(台霞)라 표기하였다. 본래 북면의 지역인데, 순종 원년에 서면에 편입되었다. 1906년 지방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2리에 속하는 마을. 조선시대 이규원의 일기를 보면 마을 뒤편 학이 앉아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학포(鶴圃)라고 하였는데, 1958년경 학의 부리 부분이 바람에 떨어지고 몸통만 남았다고 한다. 이곳은 태하1리와 마찬가지로 황토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나, 태하1리 보다 면적이 좁고 황토가 적다고 해서 작은 황토구미(黃土邱尾)라고도 한다....
-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공권력을 배경으로 공공 정책의 합리적인 형성과 집행을 구체화하는 과정. 일반적으로 근대 국가 성립 이후 190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행정의 주된 역할과 기능은 국가의 질서 유지에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 이후로는 국민의 일상생활 전반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방향으로 그 역할과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기존의 질서 유지 기능뿐만 아니라 수도·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