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홍씨
-
경기도 양주시 남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 경신리(庚申里)라는 땅 이름은 상수리 남양 홍씨 종중산인 망당산에서 볼 때 위치가 정경신방(正庚申方), 즉 서남방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양주시의 다른 지역 땅 이름과 아주 다른 특이한 유래를 가지고 있다. 경신리라는 땅 이름은 1914년에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이곳은 대한 제국 시기까지만 적성군 남면 상수리와...
-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금속이나 돌로 만든 각종 유물에 새겨진 명문(銘文). 금석문(金石文)은 쇠로 만든 종이나 돌로 만든 비석 따위에 새겨진 글자나 도형으로 쉽사리 마모되지 않고 오랜 세월 견뎌내기 때문에 내구성이 높다. 따라서 고대 등 과거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고증하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금석문 중에 주로 알려진 것은 비(碑)·묘지(墓誌) 등에 새겨진 문자이다. 비에...
-
6·25 전쟁 기간 중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빨치산 등에 의해 벌어진 양민 학살 사건. 1948년 남북한에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고 양측에 대한 우방국의 지원이 갈라지게 되자 정치적 긴장감이 높아지게 되고, 결국 북한군이 남침함으로써 6·25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6·25 전쟁 기간 중 양주는 북한군 점령 하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북한군은 양주 지구에서 반공 인사들을 잡아...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하패리에 있는 이성계(李成桂)의 딸인 숙신옹주(淑愼翁主)와 사위 홍해(洪海)의 조선 후기 사당. 숙신옹주는 조선 제1대 국왕인 태조 이성계와 후궁 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401년(태종 1) 태조가 옹주에게 택지와 집을 주어 자손이 거주할 수 있게 한 문서인 숙신옹주대사급성문(淑愼翁主家垈賜給成文)이 현존한다. 숙신옹주의 남편인 홍해의 봉호는 당성위(唐...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에 있는 남양 홍씨 집성촌. 남양(南陽)은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시 일대이다. 남양 홍씨의 시조는 당(唐) 태종이 고구려에 파견했던 홍천하(洪天河)의 후손이라고 하나 확실치 않다. 대체로 홍은열(洪殷悅)을 기세조(起世祖)로 보고 있다. 홍은열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의 통일을 달성하여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올랐다. 남양 홍씨는 남양군파...
-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 못말 북쪽에 있는 산. 마을에서 바라보면 이곳에서 맨 먼저 달이 뜬다 하여 달봉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월봉산이라고도 불렀다. 달봉산이 있는 경신리(庚申里)는 상수리의 남양 홍씨 종중산인 망당산에서 볼 때 경신 방향, 즉 서남방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달봉산에서 동쪽으로 망녕들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 남북 방향으로 신천이 흐르고 있다....
-
1949년 12월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결성된 대한청년단 산하 우익 청년 단체. 대한청년단은 1949년 12월 19일 이승만(李承晩)이 자신의 취약한 정치 기반과 반공 활동을 강화할 목적으로 전국에 산재해 있던 청년 단체를 하나로 모아 결성한 단체이다. 이승만을 총재로 하여 장택상(張澤相)·지청천(池靑天)·유진산(柳珍山)·신성모(申性模) 등이 최고 위원으로 추대되었으며, 단원은 2...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입암리·구암리에 있는 산. 망당산(望唐山)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네 가지 설이 있으나 어느 것이 정설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첫째, 원래는 명당산(明堂山)이었으나 조선 중종 때 임금의 묘지를 잡으러 지관들이 이곳에 들르자 남양 홍씨들이 이곳은 명당산이 아니라 망할 망(亡)자를 쓴 망당산(亡堂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이 산을 망당산으로 불렀...
-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칠봉산 자락에 있는 골짜기. 무자골은 남양 홍씨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던 곳으로 아들이 무성하여 무자곡(茂子谷)이라고도 하였다. 혹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무자곡(無子谷)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무자골은 내촌동 북동쪽 칠봉산 자락에 있다. 남쪽으로 넓은 벌판과 신천이 내려다보인다. 무자골 폭포 약수로 유...
-
경기도 양주시에서 선조(先祖) 혹은 선현(先賢)의 신주(神主)나 영정을 모신 곳. 좁은 의미의 사당(祠堂)은 사대부가를 비롯해 일반 민가에서 자신의 조상의 신주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말하는데, 넓은 의미의 사당은 사우(祠宇)와 같은 의미로 제사의 대상에 조상뿐만 아니라 선현까지 포함한다. 사우는 지역에 따라 향현사(鄕賢祠)·향사(鄕祠)·이사(里祠)·영당(影堂)·별묘(別...
-
경기도 양주시 남면에 속하는 법정리. ‘상수’라는 땅 이름은 원래 양주 백석과 감악산에서 내려오는 두 물줄기가 합쳐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상수(相水)]인데, 이곳에 상수리나무가 많이 서식하므로 또 다른 의미가 발생하였다[상수(橡樹)]. 일설에는 고려 말의 유신(遺臣)으로 조선 왕조에 관리로 나아간 홍지(洪智)와 관련된 땅 이름이라고도 한다. 즉 홍지가 태조 때 죽으니, 태조는 무...
-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성씨(姓氏). 성씨의 연원은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전국의 군·현의 이름을 개정하고 개국 공신을 책봉했던 940년(태조 2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이전 고대 국가에서는 성씨는 왕족과 극히 일부 중앙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후삼국 시대 성주(城主), 장군, 촌주 등의 신분을 지니면서 지방 세력을 대표하던...
-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유생.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여삼(汝三). 정순옹주(貞順翁主)와 혼인한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의 후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사 송유의(宋惟毅), 증조할아버지는 현감 송해(宋垓), 할아버지는 찰방 송영업(宋榮業)이며,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송화(宋璍)이다. 생부는 송전(宋瑼)으로, 첨지 이침(李沉)의 딸인 함평 이씨와의 사이에서...
-
성씨의 연원은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나 찾아볼 수 있다. 왕건이 전국의 군·현 이름을 개정하고 개국 공신을 책봉했던 940년(태조 23)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고려 이전 고대 국가에서는 성씨가 왕실 및 일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양주의 토착 성씨는 조선 전기 사회 상황을 전하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경기도 양주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6·25 전쟁은 1948년 남북한에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고 양측에 대한 우방국의 지원이 갈라지게 되자 정치적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북한군의 남침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은 1953년 7월 23일 당시까지의 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정하고 포로 자유 송환을 골자로 하는 휴전 협정이...
-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같은 성씨가 오랜 기간 한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지역. 집성촌이란 하나의 지배적인 동성 동족(同姓同族) 집단이 특정 마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마을이다. 집성촌이 형성된 시기에 대해선, 어떤 성씨는 고려 시대 혹은 고대까지 올려 잡기도 하고, 실제로 어떤 거주자들은 자신이 속한 집성촌이 300~400년 혹은 500~600년 전에 만들어졌다...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홍명형(洪命亨)의 정려(旌閭). 홍명형[1581~1636]의 자(字)는 계통(季通), 호(號)는 무적당(無適堂), 시호는 의열(義烈)이다.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이후 전적·형조 참의 등을 지냈다. 1639년(인조 17)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분신자살하였다. 이때 홍명형의 부...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과 어둔동 및 의정부시 녹양동 일대에 걸쳐 있는 산. 홍복산(弘福山)과 관련하여 여러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먼저 서울의 주산이 되어 백성들의 복을 누리게 하는 산이라는 데서 홍복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 외에 종루(鐘樓)처럼 생겨서 온 겨레를 깨우치는 산이라는 이야기나 부처 모양으로 생겨서 산이 보이는 지역에서 문장가나 명필가가 많이 난다는...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에 있는 조선 전기 학자 홍지(洪智)의 묘. 홍지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명철(明哲)이고, 아버지는 홍치(洪値)이다. 고려 유신(遺臣)으로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와 친구 사이였다. 조선 건국 후 관직을 낮추어 임진도승(臨津渡丞)이 되었다가 나중에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부하고, 절의를 지켜 낙향하여 시와 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