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당
-
가야진사는 용신을 모시고 있다. 용신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용당에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중리 이장의 설명을 각색하여 보았다. 옛날에는 양산을 옥당고을이라고도 했는데, 그 시절에 양산을 다스린 사또가 경상도의 가장 높은 관리인 감사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하여 마을의 총각 조씨를 대구로 보냈다. 그런데 이 총각은 대구로 가는 도중에 누군가가 자기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
그 옛날 삼국시대에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많은 전투가 일어났다. 많은 병사와 사람들이 보고픈 가족들을 뒤로 하고 전장에 나가서 죽음을 맞이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은 슬픔을 뒤로 하고 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용소에 제를 올렸다. 용소는 신라와 가야국 사이의 강을 중심으로 한 접전지로 보인다. ‘용’은 물의 신으로 청룡, 황룡, 백룡, 인룡이 있는데, 수장된 군사들을...
-
낙동강 변에 위치한 용당은 역사가 깊은 지역이다. 용당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경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신라, 가야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이곳 용당은 당시 황산강(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은 신라의 영역이고, 서쪽은 가야의 영역이다. 신라와 가야는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에 따라 황산강(낙동강)을 사이...
-
이곳 용당은 낙동강을 경계로 김해와 접하고, 천태산을 사이에 두고 밀양 삼랑진과 경계한다. 마을의 사방이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다른 마을로의 이동이 쉽지 않은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는 양산이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운 김해나 삼랑진 또는 구포로의 이동이 쉬웠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배를 타고 수로를 이용하여 다녔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에서 육로보다는 수로가 대단히...
-
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지금의 우불산(于佛山)이 ‘당(堂)갓’으로 불렸을 때 당갓 아래 마을이 형성됨에 따라 마을 이름을 ‘당촌’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786년(정조 10)부터 당촌마을이 속한 용당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1786년 웅상읍이 웅촌면으로 개칭되고, 1896년(고종 33) 8월에 전국 8도(道)를 13도로 분할하면서 용...
-
경상남도 양산시 덕계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경상남도 양산시 덕계동 속하는 덕계1마을은 덕계마을 아래쪽에 있다. 덕계1마을과 관계된 지명으로는 조평(鳥坪)·배나무골·범살미·몰강소·소심산·점비알·옹기점 등이 있다. 덕계마을은 『울산지명사』에 따르면 산 아래에 배나무가 만발하다 하여 이천(梨川)으로 불려오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 덕계로 칭했을 것으로...
-
경상남도 양산시 덕계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동일마을은 동일스위트 2차 아파트 단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파트 건설업체의 상호에서 명칭을 가져와 동일마을이라 칭하였다. 양산시 덕계동 지역은 인근 양산 삼호리 고분군과 명곡리 고분군 등을 고려할 때 청동기시대에 이미 덕계동 지역에 정착민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931년(태조 1...
-
우리가 식탁에서 흔히 먹는 딸기는 한국 품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외국에서 들여온 딸기가 더 많다. 그중 일본에서 들여온 ‘아키히메’라는 품종이 있는데 고추같이 길쭉하게 생겼다고 하여 일명 ‘고추딸기’라고도 한다. 이 고추딸기가 가정의 식탁 위에 오르기까지는 용당 주민들의 품종 선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일반적으로 딸기품종은 금향·레드펄(육보)·미홍·매향·설향·아키히메·아...
-
우리나라의 곳곳에 용과 관련된 땅이름이 많고, 이들 땅이름의 유래에 대한 설명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을 담은 역사자료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양산만 하더라도 용당이라는 땅이름은 원동뿐 아니라 서창에도 있다. 이곳 용당은 예로부터 ‘용’과 관련된 전설이 많은 지역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용당(龍塘, 양산과 김해 쪽 이름이 같다)이라고 하며, 그 앞쪽의 낙동강을 용소(龍沼)...
-
용당마을에는 마을 노인들이 아침 밥 숟가락을 놓자마자 모이는 곳이 마을회관과 그 앞의 정자이다. 이곳에 오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시간을 보내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각 마을마다 회관을 운영할 수 있는 지원금을 보내주기 때문에 회관을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에 대한 부담을 그렇게 크지 않다. 또 부인회나 청년회에서 노인 분들의 끼니나...
-
마을 앞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이곳은 물길의 흐름에 따라 쌓인 흙이 들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의 삶과 함께 숨 쉬고 있다. 용당들 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김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낙동강 강가로 가면 두 곳을 잇는 나루터가 보이는데, 이를 가야진이라 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나루터에는 여러 가지 물자와 사람들로 넘쳤던 옛 활기는 찾아 볼 수 없지만, 지금도...
-
용당들 앞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낙동강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용산이다. 이 산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마을사람들에게는 마을의 정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다. 그런데 2002년 1월 19일에 이 마을에 큰 일이 벌어졌다. 이 용산이 앞으로 갈라질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자연적으로 갈라져도 문제가 되는 것인데 인위적으로 사람이 갈라놓는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건...
-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가며 오늘도 용당 사람들은 자신이 키우는 작물에 애정을 쏟고 있다. 그들에게 딸기나 수박은 단순한 과일이 아닌 자식이요, 작품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한낮의 더운 햇빛도 견뎌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아마 홍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모종부터 시작해서 거름 주고 물주고 심지어...
-
경상남도 양산시 삼호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북부마을에서 분동되었기 때문에 북부1마을이라고 한다. 북부1마을이 위치한 옛 웅상읍(熊上邑) 지역은 인근 삼호리(三湖里)와 명곡리(椧谷里) 고분군 등을 고려할 때 청동기시대에 이미 이곳에 정착민의 취락촌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31년(태조 13) 2월에 후백제 격퇴에 공을 세운 고을 사람 박윤웅(朴允雄)...
-
경상남도 양산시 삼호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북부마을에서 분동되었기 때문에 북부2마을이라고 한다. 북부2마을이 위치한 옛 웅상읍(熊上邑) 지역은 인근 삼호리(三湖里)와 명곡리(椧谷里) 고분군 등을 고려할 때 청동기시대에 이미 이곳에 정착민의 취락촌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31년(태조 13) 2월에 후백제 격퇴에 공을 세운 고을 사람 박윤...
-
경상남도 양산시 서창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1982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북쪽에 위치한다 하여 북부마을로 이름을 붙였다. 북부마을이 위치한 웅상읍(熊上邑) 지역은 인근 삼호리(三湖里)와 명곡리(椧谷里) 고분군 등을 고려할 때 청동기시대에 이미 이곳에 정착민의 취락촌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고증해주고 있다. 고려 931년(태조 13) 2월에 후백제의 격퇴에 공(功)이 있는 고...
-
비닐하우스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 아주머니 두 분께서 담소를 나누며 딸기를 따고 계신다. 반가워 인사를 드리며 여기 어디 사시냐고 물으니, 이 지역 사람이 아니란다. 아주머니들께서는 삼랑진 사람이라면서 여기 하우스에서 일당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고 하신다. 이처럼 용당들에서는 딸기농사의 노동력은 자가 노동력 외에도 일꾼들을 많이 쓴다. 딸기농사를 하는 경우에는 일손이 많이 들어가기...
-
선장마을이 고향인 심재현(58세) 씨 내외는 10년 전에 이곳 비석골로 이사 와서 비석골 지킴이가 되었다. 어릴 적 천태산 큰골 입구에 옹달샘이 있었는데 수량도 풍부했거니와 그 물맛이 기가 막혔다고 한다. 그런데 비석골에 우물을 파고 난 뒤부터는 그 옹달샘의 수량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구언을 만들기 전 바닷물이 이곳까지 올라왔을 때는 이곳의 우물 물맛이 대부분 약간 짭짤했다...
-
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인 사창(社倉)의 하나. 우리나라에서 사창이 처음 실시된 때는 1451년(문종 1)이었다. 사창은 고려시대부터 설치해 온 의창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실시하였다. 즉, 원곡의 부족과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군자곡의 감소를 막자는 데 있었다. 농민에게 환곡 정책의 일환으로 대여했던 의창곡은 이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
-
과거 황산강(黃山江)으로 불렸던 낙동강 언저리인 용당은 가야와 신라의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경주의 신라와 김해의 가야가 서로 치고 받던 초기의 전쟁터로서 황산진의 입구와 황산하(黃山河)를 기록하고 있다. 황산진이란 물금나루나 용당나루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이후 532년에 신라가 김해의 가야를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
-
경상남도 양산시에 속하는 법정동. 삼한시대에는 우시산국(于尸山國)이었는데, 신라시대에는 우풍현(虞風縣)으로 고려시대에는 흥려부(興麗府)라고 하였다가 다시 울산군이라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울산군 서면으로 했다가 1896년 울산군 웅촌면을 웅하면과 웅상면으로 분할할 때 웅상면의 최북단 경계 지역으로서 양산군 웅상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편들·당촌...
-
용당들에 봄이 오면 곳곳에서 새콤한 딸기 냄새가 밴다. 하지만 지금의 용당들의 모습과는 달리 옛날 이곳에서는 대부분 논농사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벼농사는 딸기농사보다는 일이 많이 없어 벼농사를 짓는 것이 더 쉽지만, 논농사는 지어 봤자 남는 게 없어 대부분의 농부들이 지금은 딸기농사를 하고 있다고 딸기를 재배하는 김갑식이 말한다. 용당들에서 논농사 대신 딸기...
-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에 속하는 법정리. 용당리는 가야진사(伽倻津祠)가 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며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사조(祭祀條)에 의하면 사독(四瀆) 중 하나인 황산강(낙동강 하류)에 가야진사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민속 행사로서 매년 음력 1월 15일에 당곡마을 당산제와 중리마을 당산제를...
-
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1917년 편들, 당촌, 죽전, 생동마을을 병합하여 용당리라 하였다. 이는 현재 우불산(于佛山)이 당(堂)갓으로 불린 것과 용당마을 위쪽에 위치한 용강단소(龍岡壇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용강단소는 용당마을에서 탑골저수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당시 공이 많은 박윤웅(朴允雄...
-
사면은 첩첩이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열려있는 곳이라고는 동그란 하늘밖에 없는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운진리에서 태어난 박상권 씨는 1973년 소양댐이 건설되면서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해 대처로 나왔다. 고향 양구를 떠나 처음 취업한 곳이 청평에 있는 제지공장이었다. 성실하게 일한 것이 사장의 눈에 띄어 1974년에 같은 계열의 이곳 ‘국일농원’으로 차출되어 오게 되었다. ▶ 농사를...
-
용신을 초대하는 향연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용당의 가야진이다. 가야진은 예로부터 가야와 신라의 전투가 자주 벌어졌던 곳으로, 가야진의 진은 군대가 주둔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용신을 모시는 가야진사는 낙동강을 건너는 장병의 무사귀환과 승리를 기원하던 사당이었다. 문헌에 보이는 가야진사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따르면 신라는 강에 대하여 4곳에 국가제...
-
3월 초하루에 용당 주민의 초대를 받은 용신은 마을사람들의 근심을 어루만져주고 떠나간다. 이 의식을 보기 위하여 마을을 방문하니 마을어른이 제사의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다. 먼저 용신을 부르는 첫 번째는 의식이 부정가시기라고 한다. 이 의식은 말 그대로 부정을 쫓아 보내는 것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은 제사일 3일 전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를 지내는 마당 내외를 청소...
-
위령제를 지내는 삼국시대나 기우제를 지내는 조선시대에도 각각 그 제사의 중요도가 인정되어 국가에서는 제문을 내려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현재 전하는 문헌에 보이는 제문의 대표적인 것이 『세종실록』에 있는 것이다. 제문은 다음과 같다.(『세종실록』 권28, 세종 7년 6월 25일 계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고,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라, 심고 가꾸는 일은 정치의 먼저...
-
경상남도 양산시에 속하는 행정구역. 경상남도 양산시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동면 소재지는 원리에 있다. 면조(面鳥)는 꿩, 면목(面木)은 느티나무, 면화(面花)는 배롱나무꽃(백일홍)이다. 삼국시대 용당리에는 신라에서 가락국으로 통하는 수로인 가야진나루가 있었다. 신라와 가락국이 밀양군과 양산군을 거쳐 가는 경계 지점에 작원관원문(鵲院關院門)이 있어 육로...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유교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유적과 유물. 유교 유물 유적은 크게 유적 자료와 유물 자료로 나눌 수 있다. 유적 자료로는 서원, 향교, 사우, 누정, 정려, 비석 등의 건축물 등을 들 수 있다. 또 유물 자료로는 서원·향교 등에서 제사 의식 때 사용하는 신주(神主)와 제기, 유교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집과 가문의 역사를 담은 기록인 족보 등이 있다....
-
용당리 당곡마을의 가야진사가 있는 곳은 신라시대 눌지마립간이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터였다. 일명 옥지연(玉池淵)이라고 하는 낙동강은 강원도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경북·대구·경남과 부산을 거쳐 남해로 흘러드는 1300리 길로 영남의 젖줄로서의 구실을 하여 왔다.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인 서긍의 저서 『고려도경』에 의하면 수레 두 대가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길...
-
현재 용당들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주민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낙동강에 의존하지 않고 대부분 지하수를 퍼 올려 사용하고 있다. 낙동강 하구에 설치된 하구언 때문에 물길이 막혀서 수질이 농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낙동강 수질상태는 중리 이장의 설명에서 알 수 있다. “한 10년에서 20년 후에 이 강물은 먹는 것은 옛날 말이고 보는 것도 구역질이 나서 못할 거다. 한 30년 전만...
-
용신제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위령제 또는 기우제 형식으로 이어져왔다. 지금 현재 용당에서 이루어지는 용신제는 마을사람들의 단결을 도모하는 놀이문화로 승화·발전되었다. 즉 지금의 용신제는 제의의 형식을 극복하면서 민속놀이로 전환된 형태로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용당리 마을에서 만난 용신제 상쇠를 맡고 있는 박홍기(44세)의 설명에 놀이로서의 용신제가 잘 담겨져 있다. “...
-
과거에는 오늘날과 같은 교통로가 발달되지는 않았으나 교통로들 중에 사람들의 이동이 많고, 중요한 길들인 ‘대로’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7대로’가 있었는데 그 중에 영남에서 한양(서울)으로 가기 위한 여정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 바로 영남대로이다. 영남대로는 영남지방에서 가장 큰 길로 오늘날의 부산~양산~삼랑진~상주~문경~충주를 연결한다. 또한 영남대로는 단순히 교통로...
-
용당들에서 재배되는 딸기는 다른 마을에 비하여 반촉성 재배를 하고 있다. 촉성재배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열매를 맺는 시기를 앞당기는 것을 말한다. 용당들에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곳을 해마다 덮치고 있는 홍수 때문이다. 홍수와 딸기는 계절상 크게 상관이 없이 보인다. 딸기의 수확은 3월에서 4월이지만 홍수는 7월에서 8월 정도에 일어나기 때문이...
-
용신제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용신제를 보기 위해 삼삼오오 손을 잡고 용당들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들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는다. 용신을 보기 위하여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많은 등불의 향연이 펼쳐지고, 그 안으로 사람들은 용신의 부름을 받은 듯이 또 멀리서 들려오는 농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덩실덩실 추는 양으로 신명나게 들어간다. 가야진사가 가까워질수록 용신의 기를 느낀다...
-
만약 당신이 긴 수염을 날리며 하늘을 향해 승천하는 용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도 길몽이라 여겨 복권을 사러 가거나, 혹은 장군감이 태어날만한 태몽이라 여길 것이다. 꿈에서뿐만 아니라 옛날이야기에도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처럼 용은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신성시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용을 뜻하는 순우리말은 ‘미르’...
-
옛날 용당리에는 논농사를 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마을사람들의 삶이 대단히 곤궁했었다.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먹지 못한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예전 이곳 용당리에는 논농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곳이 홍수로 물난리가 많이 일어나는 곳이어서 예전부터 논농사를 피하고 다른 농작물을 심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용당리는...
-
이곳 용당은 양산에서도 지역개발이 덜 이루어진 오지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2007년 5월 15일자 『부산일보』에 실린 이 지역의 지가이다. “2007년 땅값 조사에서 보면 양산 지역의 공시 지가 중 공장용지 중 최하위 가격이 원동면 용당리의 ㎡당 4만1천600원이다.”(『부산일보』, 2007년 5월 5일). 그나마 이 정도의 지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철도시설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