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
-
명동의 푸르고 넓은 논에는 한창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도시화가 되어 땅값이 올라도 이곳에서 농사가 계속 될 수 있는 이유는 관개시설이 잘 되어서 농사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동이 처음부터 관개 시설이 완벽하게 좋았던 것은 아니다. 관개 시설이 되기 전에는 이곳에서도 물이 없어 가뭄으로 인해 고생이 매우 많았었다고 한다. 우리는 명곡마을 이자무 이장님을 만나...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화폐의 수요와 공급 관계. 금융이란 일반적으로는 자금의 융통, 화폐의 대차(貸借)를, 구체적으로는 대부증권에 의한 자금의 대부나 참가증권(參加證券)에 의한 자금의 출자를 말한다. 이러한 금융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은 중앙 은행인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일반 은행과 특수 은행 등 은행 금융 기관과 투자 금융 회사, 종합 금융 회사,...
-
웅상은 지역적으로 회야강 상류 유역의 풍부한 수원과 비옥한 땅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농경사회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경작지의 확대로 가족단위 노동에서 마을단위 협업 노동력의 필요성에 의해 후대에 와서 ‘농청’이라고 하는 조직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장원놀이는 조선 후기 소농경영(小農經營)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마을단위로 두레형식으로 조직된 농민단체에...
-
명동마을에서는 이 지역이 공장용지, 택지용지 조성으로 급속히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농경지가 사라지고, 공장들과 집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농경지가 사라져 농사를 짓고 살아오던 어르신들이 일손을 놓게 되었다. 생활의 터전이 없어진 어르신들은 마을 경로당에 모여 농요도 부르고 옛 일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우리도 한번 즐기며 후대에 남기고자 하는 뜻이 모아져 60~8...
-
살다보면 이름이 똑같거나 비슷하여 혼동하는 실수를 누구나 한번쯤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곳 명동마을 또한 이름이 비슷하여 생긴 일화가 있다. 명동마을이 ‘명곡’이라고 불렸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양산대학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에도 같은 지명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느 명곡마을인지 잠시 당혹스러웠다. 2007년 4월 1일, 웅상읍이 소주동, 평산동, 서창동, 덕계동...
-
경상남도 양산시 삼호동과 용당동에 걸쳐 있는 산. 『동국여지승람』이나 오래된 읍지에는 불광산으로 되어 있었으나 특별한 이유 없이 오늘날에는 대운산으로 불린다. 일부 문헌에서 “명경지수와 같은 저수지, 울창한 산림 등 주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골짜기를 항상 휘감고 있는 구름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다워 대운산으로 불린다.”고 하는 것으로...
-
박극수(61). 시인이며 수필가인 그는 한마디로 명동의 정신을 기록을 통해 계승코자 하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 그는 마을에서 제일 먼저 들에 나가고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돈이 아까워 새참도 먹지 않았다. 소출이 적어 경작하지 않는 산답(山畓)을 소작으로 얻어 밤을 지새우며 죽도록 일해도 동생들 학비며 기본 생활을 꾸려나가기에도 벅찼다. 빚은 자꾸 늘어만 가고, 모든 걸...
-
이조기(1887~1983, 명곡 출생)는 홈실댁으로 불리워졌다. 명동 본마을 이름이 홈실인 것처럼 그이 일생에는 홈실 마을 사람들의 옛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며 홈실댁은 명곡에서 1887년에 출생하여 열다섯 살 되던 해 이웃한 백동마을의 26세의 늙은 총각(당시 평균 결혼연령 20세)에게 시집갔다. 그 시절 결혼은 당사자의 의사...
-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직선으로 뻗어 있는 마을길이다. 본래는 모두 논과 밭이었던 곳이 도로와 주택으로 뒤집힌 후 마을의 모습은 많이 변화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증언은 농촌 마을이 주택지구가 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시집왔을 때는 저 앞에 전부 다 노랬습니더. 장승나무 있는데 거기...
-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마을사람들에게는 전깃불에 얽힌 기억이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이 마을은 1960년 초까지만 해도 호롱불에 의해 방안의 어둠을 부분에만 밝혔다.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길쌈을 하고, 베를 짜고,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가마니를 치고, 멍석(등시기), 봉태기, 바지게, 소쿠리, 우장(우의)를 매고, 생활 요구를 만드는 등 밤에 이루어진 모든 일은 호롱...
-
냉수 한 모금으로 입과 목을 축인 김필연(75) 할머니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벽면에 허리를 붙이고 “흠- 흠-”하면서 목소리를 가다듬는가 싶더니 금세 구성진 가락을 뽑아낸다. ▶ 면면히 이어져 오는 구성진 우리의 소리 “한강에 이 모를 부아 그 모찌기도 난감하네. 하늘에다 목화 심어 이 목화 따기도 난감하네. 만장 같은 이 모자리 장기판 만치 남었구나. 장기야 판은 있다마는 장기...
-
농청장원놀이는 처음부터 명동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이므로 어느 마을에도 이와 비슷한 놀이는 있게 마련이다. 다만 그 놀이문화의 계승의식 여부에 따라 현재의 농청장원놀이가 재현되는 것이다. 양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양산의 여러 마을에서 농청장원놀이의 재현을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사람동원이나 재정 등의 이유로 계승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은 마을...
-
2006년 3월 “양산의 한 소리꾼이 세상을 하직했다.” 제하의 기사가 양산신문에 실렸다. 웅상농청장원놀이 논매기노래 기능보유자인 이유락(李有洛) 옹이 향년 86세를 일기로 하직하였음을 알리는 기사이다. 그는 1921년에 명곡리 512번지에서 출생하여 지난 2006년에 작고했다. 어려운 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같은 또래 친구들은 학교에 가는데 월사금 50전(당시 쌀...
-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양산의 역사. 경상남도 양산시는 산과 들이 좋고 문화 유적이 많으며, 고대로부터 불교 포교지로서 그 명성이 높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던 곳이다.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쪽은 낙동강을 끼고 밀양시와 김해시, 동쪽과 남쪽으로는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금정구에 각각 접하고 있다. 경상남...
-
경상남도 양산시 명동에서 한 해 농사일을 마치고 행하던 민속놀이. 예로부터 양산시 명동(구 양산시 웅상읍 명곡리) 지역에서는 삼한시대 두레의 유풍이라 할 수 있는 농청 조직을 통하여 힘든 농사일의 능률을 향상시키고, 조직을 통한 협동심을 고취하여 왔다. 웅상농청장원 놀이는 웅상 지역 마을마다 전승되어 왔던 놀이로, 농사일의 과정에서 농청을 총지휘할 우두머리와 소임자를 선...
-
경상남도 양산시 명곡동에 있는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 성당. 웅상성당은 양산시 명곡동 지역에서 모임과 미사 등의 전교 사업을 통해 천주교 공동체를 형성하여 가톨릭을 전파하고자 설립되었다. 웅상 지역은 1962년부터 천주교가 전래되었고, 1964년 양산군 웅상면 삼호리 315번지(현 양산시 삼호동)에 동래성당 소속의 웅상공소가 설립되었다. 1986년 7...
-
소노마을은 양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뻗은 정족산(鼎足山) 줄기의 지맥에 해당하는 원효산을 뒤로 하고 자리 잡고 있다. 원효산(높이 922m)은 양산의 웅상읍·하북면(河北面)·상북면(上北面)을 경계 짓는 산이다. 웅상 회야강(回夜江)의 발원지이며, 원효암을 비롯하여 홍룡사(虹龍寺)·성불사(成佛寺)·혈수폭포(血水瀑布) 등의 명승지를 담고 있는 산이다. 그 끝자락에...
-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화폐 거래와 대부 거래를 일체화시킨 경영을 통하여 신용 통화를 공급하는 금융 기관. 우리나라에 근대적 은행 제도가 도입된 것은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개설된 1878년(고종 15)이다. 1909년 중앙 은행으로서 구(舊) 한국은행이 설립되었으나, 국권 피탈 후 업무를 조선은행에 이관당하였다가, 8·15광복과 더불어 한국은행으로 복귀하였다. 상업...
-
김종순(55) 씨는 농청장원놀이가 1998년 제30회 경남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할 때 부녀회장이었다고 한다. 그때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내 누구한테 맞아도 그렇게 울지는 않았을 기다. 그냥 눈물이 펑펑 쏟아지드라.(김종순, 명동마을 주민, 55세. 2008년 9월 3일)” 그녀는 명동에서 6년 째 웅상탁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선수...
-
경상남도 양산시 덕계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지명이 새뻐덩(억새풀이 많은 들)이고 이 곳에 새들이 많이 찾아오므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이름을 조평이라 불렀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보다는 이곳 예지명이 ‘새뻐덩’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새’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훈차하여 ‘새’가 ‘鳥’로 기록되었고, 이것이 다시 ‘조’로 불리면서 조평으로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