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026 |
---|---|
한자 | 歷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일어난 변천과 흥망 과정의 기록.
[개설]
영천(永川)은 삼한 시대 부족 국가 골벌소국(骨伐小國)이 형성된 이후 절야화군(切也火郡)·임고군(臨皐郡)·영주(永州)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조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 작은 군현은 주(州)라는 명칭을 금지하고, 대신 천(川)과 산(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면서 영천이라 하였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조치로 기존 신녕군(新寧郡)을 영천군(永川郡)에 합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고대]
『삼국사기』 신라본기 236년(조분왕 7)조에는 골벌국(骨伐國)의 왕인 아음부(阿音夫)가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사로국(斯盧國)에 항복하였으며, 신라 왕은 저택과 전지를 주어 편히 살게 하고 그 지방을 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골벌국은 진한 소국 중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사로국에 버금가는 소국 중의 하나였다.
신라에 병합된 후 절야화군이 되었고, 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장진현(長鎭縣)·신녕현(新寧縣)·민백현(黽白縣) 등 다섯 개 현을 그 영현으로 삼았다. 504년(지증왕 5) 골화성(骨火城)의 축조가 이루어지고, 531년(법흥왕 18)에는 왕명으로 제방과 수리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여 536년(법흥왕 23)에 저수지인 청제(菁堤)를 축조하였다.
757년(경덕왕 16) 지방 제도 개편 때 절야화군은 임고군(臨皐郡)으로, 사정화현(史丁火縣)은 신녕현으로 개명되어 양주(良州)에 속하였다. 925년(경애왕 2)에는 고울부(高鬱府)로 개칭하고, 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민백현(黽白縣)·이지현(梨旨縣)을 관할하였다.
[고려 시대]
후삼국 시대 영천은 신라 수도 경주 인근이므로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의 관심이 집중된 지역이었다. 925년(경애왕 2) 고울부 장군 능문(能文)이 왕건에게 투항하자 크게 우대하였다.
고려 초 영주(永州)는 신라 시대 도동(道同)과 임천(臨川) 두 현을 합쳐서 설치한 것인데, 고울부라고도 불렀다. 995년(성종 14) 자사(刺史)를 파견했으나, 1018년(현종 9) 신녕현과 함께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며, 다시 지주사(知州事)로 승격되었다.
1202년(신종 5) 경주에서 신라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이와 대립해 경주 별초군(別抄軍)과 싸움이 일어났고, 1233년(고종 20)에는 경주인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영주 관내의 이지은소(梨旨銀所)가 현으로 승격했고, 속현이던 신녕현에도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두었다.
[조선 시대]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영천 지역의 토질은 비옥·척박이 반반이었다고 하며, 풍속은 평이했고, 주민들은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토호가 많았던 영천은 예로부터 다스리기 어려워 명망 있는 문관을 골라 파견하였다.
1644년(인조 22) 영천 출신 군관 김석남(金碩南)과 심기원(沈器遠)의 역모로 한때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3년(효종 4) 다시 군으로 복원되었다. 1704년(숙종 30)에는 영천 영역이던 와촌(臥村) 일대를 하양현(河陽縣)에 할애하였다.
한편, 신녕현은 1394년(태조 3) 영주 임내 이지현을 이곳으로 이속하였는데, 1413년(태종 13)에 현감(縣監)으로 고치고 치소는 14개 속역을 거느린 장수역(長壽驛)으로 옮겨 현의 소재지로 삼았다. 1497(연산군 3)에는 길수(吉修)라는 현감이 향리들을 너무 엄하고 사납게 다스려 호장 10명의 반란을 일으키자 현을 폐하고 영천군에 소속시켰다가, 1503년(연산군 9)에 다시 복현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는데, 영천 지역에서도 정세아(鄭世雅)·조희익(趙希益)·권응수(權應銖)·정대임(鄭大任) 등 지역의 유생들이 의병을 크게 일으켜 활동했다. 특히 영천성 복성(復城)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승리를 거둔 중요한 전투로 영천과 경상좌도의 여러 읍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전투 중 하나였다.
영천 주민들은 학문을 좋아하여 퇴계(退溪) 학풍을 계승한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들에 의해서 그 명맥이 이어졌으며, 교육 기관으로 영천 향교(永川鄕校)·신녕 향교(新寧鄕校)와 임고 서원(臨皐書院)·도잠 서원(道岑書院)·입암 서원(立巖書院)·백학 서원(白鶴書院)·송곡 서원(松谷書院) 등이 지역 내 성리학적 교육과 향론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영천에는 종가·서원·재실·정자 등 많은 유교 문화 유적들이 현재에도 많이 남아 있다.
1789년(정조 13) 면리제(面里制)가 시행되면서 영천은 22개 면 291개 동, 신녕현은 8개 면 95개 동으로 개편되었다.
[근현대]
1894년(고종 31) 7월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영천과 신녕이 모두 군이 되어 대구부(大邱府)에 속하였다. 1896년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로 개편됨에 따라 경상북도 영천군과 신녕군이 되었으며, 1909년 행정구역 정리 방침에 따라 북안면 일대가 영천으로 편입되고, 입암곡(立岩曲) 일대가 청하면으로 편입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甲午變亂)과 1895년 8월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11월의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경상북도 지방에서도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通文)과 격문(檄文)이 각 지역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돌았는데, 현재 영천 향교에는 모두 4건의 의병 격문과 통문이 남아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영천 지역에서도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였다. 산남의진은 대장 정용기가 체포된 이후 중군장 이한구(李韓久)가 지휘하다가 1906년 7월 해산하였는데, 그 후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4월 재기하여 죽장·입암·포항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7년 9월 초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와 장령 다수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아들을 대신하여 대장이 된 정환직(鄭煥直)이 1907년 12월 청하에서 체포되어 순국한 뒤, 최세윤(崔世允)이 1908년 7월까지 산남의진을 이끌고 각처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말 계몽운동은 신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근대학교가 설립되었는데, 1908년 은해사(銀海寺)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해창 학교(海昌學校), 1908년 설립된 사립 영흥학교(永興學校)가 주목된다.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 후 동년 9월 지방관제에 따라 칙임관(勅任官) 군수, 판임관(判任官) 군서기 및 기수(技手)를 임명하여 지방 행정을 개편하였으며,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신녕군을 영천군에 병합하고 14개 면으로 조정하였다.
1919년 영천 지역에서도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신녕면 화성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의 대표적 인물은 신녕 공립 보통학교 교사 박필환(朴弼煥)을 필두로, 동료 교사 이석형(李錫瀅), 신녕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 그리고 황정수(黃正秀)·김호용(金浩溶)·박칠성(朴七星)·구위준(具渭浚)·홍종현(洪鍾顯)·김정희(金正希) 등이다.
1934년에는 영천(永川)·청통(淸通)·화산(花山)·신녕(新寧)·자양(紫陽)·임고(臨皐)·고경(古鏡)·화북(華北)·금호(琴湖)·대창(大昌)·북안면(北安面) 등 11개 면으로 재편성되었고, 1937년 영천면이 영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영천 지역도 신녕 전투와 영천 전투 같은 큰 전투가 있었다. 1950년 9월 5일부터 9월 13일까지 펼쳐진 영천 전투는 국군 단독으로 전개한 반격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낙동강 방어선에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점이 된 전투였다. 1950년 9월 6일부터 9월 15일까지 벌어진 신녕 전투는 대구 점령을 목표로 하던 북한군을 격퇴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토대를 마련해 준 전투였다.
1971년 6월 1일 화북면에 삼창출장소가 설치되고, 1973년 7월 1일 금호면이 금호읍으로 승격되어 2읍 9면이 되었다. 1979년 5월 1일 영천읍에 동부·남부·북부 출장소를 설치하고, 1981년 7월 1일 영천읍 일원을 관할로 영천시가 설치되어 1읍 9면 9동[동부동·중앙동·명산동·대전동·교동·완산동·주남동·봉작동·영도동]이 되었다.
1983년 2월 15일 금호읍 도남동, 청통면 오수동·쌍계동, 화산면 매산동이 영천시에 편입되었고, 1984년 8월 30일 영천시 청사를 완산동에서 문외동으로 이전하였다. 1986년 4월 1일 화북면 삼창출장소가 귀호동을 편입하여 화남면으로 승격되어 1읍 10면 9동이 되었으며, 1987년 1월 1일 임고면 언하동·신기동이 영천시에 편입되어 동부동 관할에 넣었다. 1989년 1월 1일 청통면 서산리가 영천시에, 화북면 용계·월곡리가 화남면에, 서산동은 대전동 관할로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의 통합에 따라 영천시와 영천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영천시가 되었으며, 1998년 10월 20일 교동·대전동 일부[대전·서산]를 서부동으로, 명산동·대전동 일부[오미]를 중앙동으로, 주남동·봉작동·영도동을 남부동으로 합동하여 1읍 10면 5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