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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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源齋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거조길 400-2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우경원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윤긍(尹兢)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사.
[개설]
윤긍[1432~1493]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초명은 윤흠(尹欽)이고, 자는 경부(敬夫), 호는 죽재(竹齋)이다. 이조참판 윤헌(尹憲)의 아들로 1447년(세종 29) 16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0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다. 1489년(성종 20) 헌납을 거쳐 1490년 이조정랑·통정·호조참의·이조참의가 되었다.
윤긍은 이조정랑 재직 중 왕이 “내 집에 쥐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다른 대신들은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그가 고양이를 키우면 쥐가 다니지 못한다고 해, 왕의 신임을 받았다. 이때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 등의 인재를 천거하여 참봉에 임명하게 하였다. 그 뒤 1492년 노령으로 관직을 사직하고, 영천군 팔공산 아래 대재촌(大才村)에 들어가 살았다.
[위치]
신원재(新源齋)는 영천 은해사 거조암에 도착하기 전 500여m 지점에서 솔밭이 있는 좌측 중신원마을로 150m 정도 들어가면 마을 입구 길 좌측에 있다.
[변천]
신원재는 그동안 상량 묵서나 상량 기문이 없어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수를 위해 2009년 지붕을 헐어내는 작업 중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오던 상량문이 기와에 새겨져 있어 건립연대를 알게 되었다.
기와는 용마루 중앙부에서 발견되었는데 ‘신묘팔월초사일(辛卯八月初四日)’로 명문이 새겨져 있어 1651년(현종 10)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는 청통면 치일리에 사는 종손이 보관하고 있고, 그동안 간혹 기왓장 1~2장 정도의 파손된 부분은 거조암의 기와를 이용하여 수리했다고 한다.
창건 이후 360여 년 동안 한 번도 중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2009년 건물이 노후되고 누수로 연목이 부식되는 등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연목(椽木) 이상을 해체, 보수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신원재 뒤에는 신원사(新源祀)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신원재 대청 배면 주심도리에는 취산(鷲山) 신억(辛檍)이 1967년에 쓴 ‘신원재기(新源齋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조상의 행적과 추모하는 내용들이 담겨있다.
[형태]
신원재는 정방형의 가파른 경사지에 재사·주사(廚舍)·대문채 건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변을 일곽하는 담장은 없다. 배치 형식은 재사 전면에 3칸 평대문의 문간채를 통해 출입하고, 재사 좌·우측에 3칸 규모의 맞배집 형태의 주사를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튼‘口’자형을 취하고 있다.
재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실의 배열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각각 1칸씩의 방을 드린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경사지에 건립한 건물로 주사와 대문채가 놓인 영역과 구분하기 위채 자연석을 이용하여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기단을 조성하였다.
기단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4단으로 축조하고 온돌방 전면에는 함실아궁이를 설치함으로서 기단이 잘려 있다. 기단 상면은 강회 다짐으로 마감하고 초석은 넓적한 방형의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정면 툇마루 앞에만 원주를 세우고 나머지는 각주를 세웠다. 원주는 지름이 260㎜로 자연미가 넘치는 구불구불한 것도 있으며, 각주는 220×220㎜로 건물 규모에 맞는 적절한 크기를 사용하였다.
문은 방의 경우 정면 쪽은 하인방 위에 가로로 문틀[인방]을 하나 더 설치한 후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았고 청방 간에는 아래에 굽널을 끼운 외여닫이 굽널 세 살문이다.
방의 측면 쪽으로는 문을 내지 않았으며, 대청의 뒷벽은 판벽으로 구성하고 쌍여닫이 판창을 달았는데 창 아랫부분은 머름이 설치되어 있다. 전면 기둥 상부에는 연꽃이 초각된 익공부재를 끼우고 납도리인 처마도리 장혀와 창방 사이에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가구는 5량 구조로 청방 간 가운데 기둥에서 대들보를 전·후로 연결하였다. 청방 간 뒤 칸은 보 아래에 별도의 상인방을 보강했다.
보 위에는 재사 건축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포대공을 설치하여 종보를 받게 하였고, 종보 위에는 제형 판대공 형식의 포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도리와 장혀 사이에는 소로가 끼워져 있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으로 마루 끝에는 망와를 사용하였다. 재사 앞의 좌·우측 주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집이며 모두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평삼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현황]
신원재는 초창 당시 원래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재사 전면 주심도리에 ‘신원재(新源齋)’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 배면 주심도리 상부에 ‘신원재기(新源齋記)’ 기문 편액이 걸려있다.
건물은 2009년 보수 이후 잘 관리가 되고 있다. 좌·우측 주사 사이 마당에는 정사각형의 보도용 블록이 깔렸고 재사로 오르는 화강석 장대석 계단이 기단까지 연결되어 있다. 계단은 2009년 재사 보수 시 새롭게 놓인 것으로 보인다.
재사 좌측에 위치한 주사는 마당 쪽 처마에 샌드위치 패널을 설치하여 처마 선을 연장하였고, 지붕에는 일식 기와를 덮었다. 우측 주사 지붕과 대문채 지붕에는 플라스틱 기와를 덮었다.
대문채는 가운데를 출입구로 사용하는데 문은 설치되지 않았다. 양협 칸은 배면을 제외한 벽체가 모두 막혀 있고, 배면은 좌측의 경우 개방되어 창고로 사용하고 우측은 샌드위치 패널로 막혀져 있다.
[의의와 평가]
신원재는 건물의 건립연대가 명확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시대 기법에 따라 건축된 고식이며 가구 방식도 간결, 소박하다. 또한 건축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외관 또한 매우 뛰어나 영천 지역 일반 재사 건축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건물의 장엄성이 뛰어나므로 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