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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2045
한자 婚禮
이칭/별칭 결혼식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집필자 문애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평생 의례

[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남녀가 혼인할 때 치르는 의례 과정.

[연원 및 변천]

혼례(婚禮)는 예나 지금이나 남녀가 부부가 되는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 의례로서,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혼례의 형태는 조선 시대 『가례(家禮)』나 『사례편람(四禮便覽)』의 절차에 따라 행해지는 의례를 말한다.

혼례 절차는 친척이나 이웃을 통해서 중매가 이루어지고, 신랑 집에서 신랑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이 적힌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신부 집에 보내며, 이를 받은 신부 집에서 혼인날을 택일한다. 혼인 전에 신랑 집에서는 혼인서와 각종 옷감과 폐물이 든 납폐를 신부 집에 보내며, 혼례는 주로 신부 집에서 행했다.

현재는 남녀 당사자 간의 교제를 거쳐 양가의 동의를 얻어 혼인하는 연애결혼이 많지만, 주변인의 중매를 통한 혼인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1990년대 초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결혼 정보 회사를 통한 결혼도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혼례는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신랑과 신부의 학벌, 직업, 양가의 경제적·사회적 여건을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혼인 장소는 예식장이 주를 이루지만, 종교에 따라 교회나, 성당, 절 등을 선택하는 사례도 있다.

[절차]

1. 의혼

혼례의 첫 단계로 의혼(議婚)의 단계가 있는데, 이는 자녀가 혼인 적령기가 되면 중매쟁이를 내세워 사위 될 사람의 성품과 학력, 생활 능력, 형제간의 우애 등을 알아보고, 며느리 될 규수의 성품과 생활력, 어른 봉양 태도 등을 알아보는 과정이다.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가 고향인 박 씨[1934년생]는 시누이가 중신을 해서 고향에서 혼례를 치렀다고 하는데, 혼례를 치를 당시 박 씨의 나이는 19세, 남편의 나이는 25세라고 했다.

또, 임고면에 사는 이규택[1937년]의 경우 27세가 되는 해에 혼례를 치렀고, 당시 중신은 동네 어른이 했다고 한다. 배우자는 영천시 화북면에 사는 네 살 연하의 처녀였으며, 처가에서 혼례를 치렀다고 한다.

고경면 황정리에 사는 권혁분[1925년생]는 큰딸을 시집보낼 때, 이웃의 친척이 중신을 했는데, 사위는 대구 출신으로 결혼식은 신부의 집이 아닌 대구의 예식장에서 했다고 한다.

2. 납채

다음은 납채(納采)의 절차로, 혼인하기로 결정되면 신랑 집에서는 혼인날을 잡기 위해서 신랑의 사주(四柱)를 적은 사주단자를 신부의 집으로 보낸다. 이는 일종의 청혼 서식으로 신부의 부모에게 혼례를 승낙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과 더불어 신랑의 사주를 넣어서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신부 측에서는 혼인 날짜를 잡아서 답장에 해당하는 택일단자(擇日單子)를 보내는데, 이를 ‘날받이’라고 한다. 택일단자는 봉투에 넣고, 봉투 겉의 전면에 ‘연길(涓吉)’이라고 쓴 다음 중매인 또는 복 많은 사람 편에 신랑 집으로 보내며, 택일단자에 허혼서(許婚書)를 동봉하기도 한다. 영천 지역에서는 부모가 결혼한 달에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 그 달은 피한다고 한다.

3. 납폐

납폐(納幣)는 납채(納采) 뒤 정혼(定婚)의 성립을 나타내기 위하여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서신과 폐물을 보내는 의식을 말한다.

허혼서를 받고, 혼인 일자가 정해지면, 신랑 측에서는 함을 보내는데, 함에는 혼례에 필요한 옷감이나 예장지[혼서지], 곡식 등을 넣고, 청실과 홍실, 신부의 화장품, 가위, 신발 등도 함께 넣었다고 한다.

영천시 고경면 황정리에 살던 최순교[1945년생]에 따르면, 지금은 다들 함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물목(物目)’이라 했으며, ‘물목 온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물목에는 폐물과 한복, 소 한 마리 정도의 고기와 떡 등을 보내왔다고 한다. 물목을 가지고 온 사람은 지금처럼 신랑이나 신랑의 친구가 아니라, 중신애비였다고 한다.

4. 혼인

의혼과 납채, 납폐 절차가 끝나고 수개월 혹은 수일 뒤 혼례식을 올리게 된다. 혼례식은 초행(初行)이라 해서 신랑이 처음으로 신부 집에 가는 걸음으로, 초행 혹은 초행걸음이라 불린다.

1953년에 결혼한 박 씨의 경우, 신랑이 초행길을 걸어서 왔다고 한다. 당시에는 차가 귀하고 가난했기 때문에 대부분 걸어서 초행길을 갔다고 한다.

이규택[1937년생] 씨는 1964년에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 차가 귀하던 시절이었지만 군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군 차량을 이용하여 초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며, 그 무렵에는 짐과 사람이 함께 탈 수 있으면 차를 이용했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짐은 소에다가 실어 산을 가로 질러서 가기도 했다고 한다.

신랑은 혼례를 치른 뒤 사흘이 되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당시에는 혼례를 치르고 바로 시집을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신부 묵히기’라 하여 보통 1년 동안 해를 묵히고 시집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가 고향인 박 씨[1934년생]는 집이 가난하여 3개월 만에 시댁으로 갔다고 하는데, 이때 친정아버지와 함께 갔으며, 시부모의 이불과 옷가지를 장만해서 갔다고 한다.

영천시 임고면에 사는 김정태[1941년생]에 따르면, 신부가 시집을 갈 때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고모·이모·숙모 등 주변 친척들에게 줄 예단을 준비해 갔다고 한다. 예단으로는 시아버지의 참바지,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해 드릴 옷감, 시어머니의 치마, 저고리를 해 드릴 옷감, 시누이 저고리 할 만한 옷감을 가져갔다고 한다. 신부가 시집을 가고 난 뒤에는 보통 1년이 지나야 친정에 갈 수 있었는데, 이를 근친(覲親)이라 하였다. 첫 근친 때에는 햇곡식으로 만든 인절미와 송편 등을 준비해서 친정으로 갔다고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혼례의 전승은 꽤나 단절된 상황에 있다. 1930년대 출생한 70대 이상이 되는 경우는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천시 야사동에 살고 있는 이상봉[남, 70세] 씨는 1970년대에 영천문화원에서 결혼식을 치렀다고 하며, 성내동 김원조[여, 62세] 씨는 1973년에 서울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는 대부분 신혼여행으로 경주를 다녀왔다고 한다.

1970년대 들어서 영천 지역에도 현대식 예식장이 생겨나면서 혼례 문화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영천 지역에는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예식장이 두서너 곳 있었다. 그 당시에는 사진관에서 예식장을 운영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영천초등학교 인근에 있었던 자연사진관에서는 2층에 예식장을 꾸리고 있었다고 하며, 영천문화원에서도 많은 지역민들이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이 예식장들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는 교촌동에 있는 현 향군회관 건물이 농민예식장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산업화·도시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농촌을 떠나 도시민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지역민이 증가하게 되었고, 더불어 현대식 결혼식을 치르는 예식장 문화가 더욱 발달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완산동 영천시장 인근에 예식장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문내동에 사는 이남희[남, 55세]는 1982년에 역전사거리 근처의 영천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며, 이 무렵 수덕예식장이 생겼다고 한다. 수덕예식장은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성행하고 있는 영천의 대표적인 예식장이다.

최근에는 예식장에 국한하지 않고 결혼식 장소로서 다양한 선택을 하는 사례도 있다. 화산면 당지리가 고향인 김태훈[남. 38세]는 결혼을 생각하면서부터 서구식 결혼보다는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따져볼 수 있는 전통 혼례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통 혼례를 올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봤지만 영천에는 적합한 곳이 없어서 대구향교에서 혼례를 치렀다고 한다.

과거에는 결혼식 장소를 선정할 때에 부모님의 견해가 우선인 경우가 많았지만, 점차 결혼 당사자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따르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인의 일생의례』(국립문화재연구소, 2010)
  • 『한국일생의례 자료집』(국립민속박물관, 2011)
  • 인터뷰(영천시 문내동 주민 이남희, 남, 55세, 2012. 1.)
  • 인터뷰(영천시 성내동 주민 이세희, 남, 68세, 2012. 1.)
  • 인터뷰(영천시 야사동 주민 이상봉, 남, 70세, 2012. 1.)
  • 인터뷰(영천시 화산면 당지리 향민 김태훈, 남, 38세,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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