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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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彦璛 |
영어공식명칭 | Jeong Eon-suk |
이칭/별칭 | 군서(君瑞),검암(儉巖),수고헌(壽考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600년 - 정언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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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정언숙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정언숙 안동판관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35년 - 정언숙 줄포 우거 |
활동 시기/일시 | 1640년 - 정언숙 삼가현령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50년 - 정언숙 영덕현령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67년 - 정언숙 원주 이거 |
활동 시기/일시 | 1685년 - 정언숙 통정대부 가자 |
활동 시기/일시 | 1690년 - 정언숙 가선대부 가자 |
활동 시기/일시 | 1692년 - 정언숙 동지중추부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93년 - 정언숙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 검암정사 이거 |
출생지 | 정언숙 출생지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정언숙 이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상줄동 |
수학|강학지 | 검암정사 -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
묘소|단소 | 정언숙 묘소 -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나주(羅州) |
대표 관직|경력 | 예천군수|동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 정착한 학자.
[개설]
정언숙(丁彦璛)[1600~1693]은 예천군수,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낸 문신이자, 나주정씨의 영주 입향조이다.
[가계]
정언숙의 자는 군서(君瑞), 호는 검암(儉巖) 또는 수고헌(壽考軒),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명종 연간 병조판서와 좌찬성을 지낸 정응두(丁應斗)[1508~1572], 할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정윤복(丁胤福)[1544~1592]이다. 생부는 병조정랑을 지낸 정호공(丁好恭)[1565~1611]인데, 참봉 정호약(丁好約)의 양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 광주정씨(光州鄭氏)이며, 부인은 정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이다.
[활동 사항]
정언숙은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음보로 전설사별좌에 제수되었다가, 1624년 겨울 의금부도사에 올랐다. 1632년 사헌부감찰과 호조좌랑을 거쳐, 1633년 안동판관이 되었다. 1635년(인조 13) 원주로 귀향하던 중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의 줄포[지금의 영주시 상줄동]의 경관에 빠져, 나이준(羅以俊)[1602~1676]의 농막을 빌려 한동안 유숙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완전히 줄포에 우거하였는데, 이후 영주 지역에 나주정씨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정언숙은 1640년(인조 18) 삼가현령, 1649년 활인서별제, 형조좌랑을 거쳐, 1650년(효종 1)에 영덕현령으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영덕 지역 토호들의 농간을 법으로 다스렸는데, 앙심을 품은 토호들에 의해 무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천으로 돌아와 김응조(金應祖)[1587~1667], 나이준 등 여러 선비와 교유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 1656년 예천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취임하지 않았으며, 원주의 여막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돌아왔다. 1665년(현종 6) 어머니 묘소를 원주 동쪽 사악(沙岳)으로 옮기고, 1667년 사악 아래 영랑촌(永浪村)[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다 검암정사(儉巖精舍)를 짓고 이거 하였다. 이때 김응조를 비롯한 영천의 여러 선비가 전별 모임을 베풀고 시를 짓고서는 성책하여 『선유록(仙遊錄)』이라 했다. 1685년(숙종 11)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1690년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1692년에는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학문과 저술]
정언숙의 문집으로 2권 1책의 『검암시집(儉巖詩集)』이 전한다. 곽종석(郭鍾錫)[1846~1919]이 서문을 썼다.
[묘소]
정언숙의 묘소는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언숙의 현손 정지성(丁志宬)[1718~1801]이 유사를 짓고, 종후손 판서 정범조(丁範祖)[1723~1801]가 묘갈명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