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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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基錫 |
영어공식명칭 | An Gi-se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3월 25일 - 안기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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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0년 8월 18일 - 안기석 풍기기독청년회 창립대회 총무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안기석 신간회 영주지회 간사 선임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30년 - 안기석 영주 1차 격문 투쟁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68년 10월 6일 - 안기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6년 - 안기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안기석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거주|이주지 | 안기석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활동지 | 안기석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간회 영주지회 간사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안기석(安基錫)[1897~1968]은 풍기기독청년회·풍기소작조합에서 활동하였으며, 신간회 영주지회의 간사 및 회원을 지냈다.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1930년 영주 1차 격문 투쟁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었다.
[가계]
안기석은 1897년 3월 25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안기석은 1920년 8월 18일 풍기예배당에서 열린 풍기기독청년회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총회 석상에서 총무로 선출되었다. 이어 안기석은 1923년 5월 1일 풍기소작조합의 메이데이 기념 강연회에 연사로 나섰다. 1927년 8월 29일 신간회 영주지회가 설립되어, 영주에서도 민족협동전선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안기석은 1927년 12월 개최된 제1회 신간회 영주지회 대회에서 간사진이 17명에서 25명으로 증가될 때, 새로이 간사로 선임되었다. 그 뒤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평회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영주의 사회운동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영주에서는 격문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미 영주청년동맹에서는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1929년 11월 13일 제6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광주학생충돌사건’을 조사하기로 한 바 있다. 또한, 신간회 영주지회 회원들 상당수도 영주 격문 투쟁에 관련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신간회 영주지회는 1929년에 신간회 본부가 전국의 138개 지회를 5등급으로 나누었을 때, 14개 지회만 선정된 1등 지회에 포함될 수 있었다.
안기석은 영주 1차 격문 투쟁에 깊이 관여하였다. 영주 1차 격문 투쟁에서 살포된 격문은 1930년 1월 31일 안기석을 포함한 김준상(金俊相)[1910~?]·윤차경(尹次慶)·권석환(權錫煥)[1907~1971] 등이 작성한 것이었다. 「학생제군에게」와 「전조선적 학생 대검거와 조선총독 폭압정치 및 야만적 경찰의 압박에 전조선 피압박계급 대중은 일제히 분기하자」라는 격문의 제목은 당시 서울에서 살포된 그것과 일치하였다. 1930년 2월 2일 윤차경과 권석환은 두 종류의 격문을 영주공립보통학교 등에 살포할 계획이었다. 윤차경과 권석환은 격문 300매 중 77매를 그날 밤 영주공립보통학교 제2교사에 들어가 3학년과 6학년생 교실함 속에 전부 살포했다. 이들은 1929년 11월에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일제에 대한 항쟁이 폭발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이에 영주 사람들도 “잠에서 깨어나 운동장에서, 시장에서 조선민족해방만세를 외쳐라”라며 선동하였다. 또한, 일제 침략에 대한 부당성과 그에 따른 조선 민중의 몰락을 지적하며, 일제에 대한 투쟁을 선동하였다. 이처럼 안기석이 참여한 영주 1차 격문은 학생과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두 종류로 작성되었다.
안기석이 참여한 이 영주 1차 격문 투쟁은 1930년 2월 4일부터 시작된 검거 선풍을 몰고 왔다. 청년동맹원뿐만 아니라 신간회나 농업조합 간부까지 거의 2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0년 2월 8일에서 9일에 걸쳐 이틀 동안 안기석을 비롯한 윤차경·김준상·정효동(鄭效東)·황윤경(黃潤慶)[1908~?]·권석환 등 6명이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가택침입 등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안동검사분국으로 송치되었다. 며칠간 취조당한 후 1930년 2월 15일에서 16일에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안기석은 예심에 회부되었고, 봉화청년동맹의 황윤경만 1930년 2월 19일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안기석은 1930년 3월 13일 대구로 압송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0년 5월 30일 최종 취조가 끝나고, 1930년 6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930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주거침입 혐의로 징역 10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안기석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