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98
한자 李台重
이칭/별칭 자삼(子三),삼산(三山),문경(文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4년연표보기 - 이태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30년 - 이태중 정시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35년 - 이태중 흑산도에 위리안치
활동 시기/일시 1736년 - 이태중 영암으로 이배
활동 시기/일시 1739년 - 이태중 진천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40년 - 이태중 갑산 유배
활동 시기/일시 1743년 - 이태중 부교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51년 - 이태중 단양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53년 - 이태중 황해도관찰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54년 - 이태중 평안도관찰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56년 - 이태중 호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임명
몰년 시기/일시 1756년연표보기 - 이태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96년 - 이태중 청백리 녹선
추모 시기/일시 1834년 - 이태중 문경(文敬) 시호 추증
추모 시기/일시 1865년 - 이태중 불천위 선정
출생지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신죽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낙향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신죽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거주지 -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구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산
대표 관직 호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영조 대 청백리에 녹훈된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문신.

[개설]

이태중(李台重)[1694~1756]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강직한 성품으로 외직에 있을 때 공평무사한 목민관으로 활동하였으나, 영조(英祖)[재위: 1724~1776]의 심기를 건드려 귀양을 갔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는 고향인 보령[현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신죽리 농현]에서 강학하였다. 후에 그 성품을 인정받아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삼(子三), 호는 삼산(三山)이다. 이색(李穡)[1328~1396]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정기(李廷夔)[1612~1671], 할아버지는 이행(李涬)[1657~1702]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병철(李秉哲), 어머니는 박태상(朴泰尙)[1636~1696]의 딸이다. 부인은 초취(初娶)는 권감(權瑊)의 딸, 재취는 경주 김씨 김세호(金世豪)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태중은 1717년(숙종 43) 진사시에 입격하고, 1730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마방목(司馬榜目)과 문과방목(文科榜目)에 거주지는 충청도 결성(結城)으로 기재되어 있다. 1728년 결성현감(結城縣監) 이두삼(李斗三)과 관련된 기록에서, 이태중이 당시 결성에 살고 있었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고, 1731년 결성의 집에 있는 이태중을 잡아오라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록이 있어, 이태중이 주로 결성에서 거주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734년에는 정언(正言) 이태중이 충청도 보령에 있다는 기록도 확인된다. 결성은 보령과 바로 인접한 지역으로, 이태중이 결성과 보령을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태중의 아들 이윤영(李胤永)이 남긴 「심관기(心觀記)」란 글에 “우리집 농강정사(農岡精舍)가 구산(龜山) 아래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구산은 결성으로 지금의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이다.

1735년(영조 6) 지평(持平)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1721년(경종 1)부터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사류(士類)들의 참변] 때 화를 입은 노론 4대신[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의 신원(伸寃)[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영조(英祖)[재위: 1724~1776]가 추진하는 탕평책에 대한 불만으로 받아들여져, 분당을 일삼는다는 탄핵을 받고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었다. 이듬해에는 영암으로 이배되었다. 그 뒤 양사(兩司)[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 보령[현 보령시 천북면 신죽리 농현]에서 권학권농(勸學勸農)에 힘썼다.

1740년에 다시 지평이 되어 당시 소론이었던 좌의정 유봉휘(柳鳳輝)[1659~1727], 영의정 조태구(趙泰耉)[1660~1723]의 관작을 추탈(追奪)할 것과 영의정 이광좌(李光佐)[1674~1740]가 아버지의 묘를 ‘왕(王)’ 자 산맥(山脈)에 쓰고 나서 지사(地師)에게 누설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죄를 들어 파직할 것을 주청하다가, 도리어 ‘당습(黨習)을 고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산에 유배되었다. 그해에 영경연사(領經筵事) 송인명(宋寅明)[1689~1746]이 이태중의 귀양을 풀어줄 것을 청하자 영조가 승인하여 풀려나왔고, 부교리·황해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부제학·호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 진도군수, 황해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 공평무사한 정치 활동을 하였다.

이태중은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국왕 영조의 심기를 건드려 엄한 언사를 듣거나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소신에 따라 일을 처리하였다. 1756년(영조 32) 이태중이 사망한 후 쓰인 졸기(卒記)에는 “‘청렴 검소 근후’는 이태중이 본디 간직한 것이었고, 이익을 좋아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에 비교하면 뛰어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삼산집(三山集)』이 있으나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신죽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96년(정조 20)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834년(순조 34) 시호 문경(文敬)이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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