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65
한자 衛正斥邪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60년대 이후 - 위정척사운동 시작
전개 시기/일시 1860년대 - 위정척사운동, 통상반대운동으로 발전
전개 시기/일시 1870년대 - 위정척사운동, 최익현 주도의 개항반대운동으로 발전
전개 시기/일시 1880년대 - 위정척사운동, 개화파의 개화정책에 대한 개화반대운동 발전
전개 시기/일시 1890년대 - 위정척사운동, 항일의병운동으로 발전

[정의]

1860년대 이후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서 일어난 반침략·반외세 운동.

[개설]

위정척사운동은 위정척사 사상을 기반으로 성리학적 세계관과 지배체제를 강화하여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한 반침략·반외세 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위정척사 사상은 서양의 학문에 대한 전래와 함께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나타났다. 위정척사는 한자 그대로 정도(正道)·정학(正學)을 지키고 이단(異端)과 사학(邪學)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1860년대에 이항로(李恒老)[1792~1868]와 기정진(奇正鎭)[1798~1879] 등에 의해 체계화되었으며, 김평묵(金平黙)[1819~1891]·유중교(柳重敎)[1832~1893]·이진상(李震相)[1818~1886]·최익현(崔益鉉)[1833~1907]·유인석(柳麟錫)[1842~1915] 등이 계승하여 발전시킨 사상이다.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여기고 그 밖의 학문이나 사상을 사학과 이단으로 배척하는 논리는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불교와 도교, 그리고 양명학 등을 이단으로 배척하게 하였다. 또한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의 전래로 인하여 전통적인 지배질서가 흔들리면서 척사라는 논리가 강조되었다.

[경과]

조선 말기 위정척사운동은 1860년대의 이항로로 대표되는 외세와의 통상반대운동, 1870년대 최익현으로 대표되는 왜양일체론에 기반한 개항반대운동, 1880년대 개화파에 의한 정부의 개화정책에 대한 개화반대운동, 1890년대 항일의병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보령 지역에서는 황재현(黃載顯)[1848~1903]과 백낙관(白樂寬)[1846~1883]이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보령의 무과 급제가인 황재현이 1881년 3월 23일 척사상소를 올렸다. 외세의 압박에 의한 위기의식을 분석하면서, 무과 출신답게 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적극적으로 군비정책 다섯 가지를 제안하였다. 첫째는 장수 선택, 둘째는 진법 연습, 셋째는 먹을 것 저축, 넷째는 병졸 단련, 다섯째는 청야전술이었다. 황재현의 척사론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응 방책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외세와의 싸움보다는 내수와 민보를 통한 내부적인 정비가 중요하다는 내수외양론에 바탕을 둔 대응 방안이었다.

이어 1882년 5월 24일 보령시 남포의 유생 백낙관이 남산에 봉화를 올리면서 상소를 올려 왕에게 보고되었다. 신사척사상소운동(辛巳斥邪上訴運動)을 전개한 인물 중 벼슬하지 않은 유생이 상소를 올린 것은 처음으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백낙관은 상소문을 통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집권 세력을 난신적자(亂臣賊子)[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 책략과 일본의 침략 의도를 비난하면서,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을 화이론적 사고방식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았다. 즉,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조선 책략과 같은 반성리학적이고, 외세 침략을 조장하는 서양문화를 배격하고, 외세와 손잡고 나라를 망치려는 개화 관료들을 처단하며, 왕과 왕비도 그동안의 잘못을 반성하고 바른 길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 나타난 조상들의 국가 수호의 굳센 의지를 지킨다면 외세를 막을 수 있다고 상소문에 서술하였다.

[결과]

백낙관은 유생들이 상소의 방법으로 전개하였던 집단 복합상소를 충청도 지역에서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실패하자 남산 봉화 후에 단독으로 상소를 올려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는 왕과 왕비를 규탄하고 집권 개화파들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다가 임오군란의 정치사건에 휘말려 결국 참형을 당하였다. 백낙관은 신사척사상소와 관련하여 전국적으로 홍재학(洪在鶴)[1848~1881]에 이어 두 번째로 희생되면서, 충청도 지역에서는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보령 출신으로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한 황재현백낙관의 이러한 활동은 화이론에 바탕을 둔 성리학적 내수외양(內修外養)[안으로 나라를 굳건히 다스리고 밖으로 힘을 키움] 정신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는 외세와 개화정책에 대해 반대하고 집권세력과의 갈등을 조장하였으며, 조선 책략에 대한 비판, 국외에 대한 비판 등 당시 전국 유생들의 생각과 맥을 함께 하고 있었다. 또한 보령 지역 유생들의 성리학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국가를 수호하겠다는 국권수호운동의 일단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더 나아가 황재현위정척사운동 이후 을미의병에 참여하고 남포성 전투에 참여하는 등의 의병 활동을 펼친다는 점에서도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참고문헌]
  • 『보령시지』(보령시지편찬위원회, 2010)
  • 네이버 지식백과(https://term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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