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746
한자 義慈王
이칭/별칭 부여의자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기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641년 - 의자왕 즉위
몰년 시기/일시 660년 11월 7일연표보기 - 의자왕 사망
성격 국왕
성별 남성

[정의]

백제 제31대 왕.

[가계]

의자왕(義慈王)[?~660]의 성은 부여(扶餘)이고, 이름은 부여의자(扶餘義慈)이다.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武王)[재위 600~641]의 맏아들이며, 부여융(扶餘隆)[615~682]·부여효(扶餘孝)·부여풍(扶餘豊) 등의 아버지이다.

[활동 사항]

의자왕은 632년 1월 태자로 책봉되었고, 641년 3월 무왕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백제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기록에 따르면 씩씩하고 용감하며 대담하고 결단성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가 있어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고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642년 1월 백제왕의 어머니가 죽었으며 이복동생의 아들 교기(翹岐)와 어머니 자매의 딸 4명 및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를 비롯한 고명한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쫓겨났다는 백제 사신의 말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하여 무왕의 왕비였던 사택왕후(沙宅王后)가 죽자 의자왕이 친위 정변을 일으켜 왕권을 강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644년에는 아들 부여융을 태자에 책봉하였는데, 의자왕을 지지한 세력으로는 부여씨 왕족들과 사씨(沙氏)·백씨(苩氏)·연씨(燕氏)·국씨(國氏) 등의 귀족 가문을 흔히 꼽는다.

의자왕은 642년 7월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40여 성을 공략하는 등 영토 전쟁에서 신라를 압박하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말년에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향락을 일삼았다고 각종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645년 당(唐)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가 군사 3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압박함으로써 당나라의 호감을 얻는 사이 백제는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 외교 정책을 펼쳐 당나라의 신뢰를 잃은 것이 백제 멸망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 중국 기록인 『문관사림(文館詞林)』에 실린 당 태종의 국서를 분석하여 644년경 의자왕이 당나라의 명의 장원창(蔣元昌)을 보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심한 병에 걸렸기 때문에 국정을 잘 돌보지 못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의자왕은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나라가 멸망한 뒤 당나라 장안(長安)[현 중국 산시성 시안시]으로 끌려가 11월에 사망하였다.

[묘소]

의자왕은 사망한 뒤 중국 뤄양[洛陽] 북망산(北邙山)의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 무덤 옆에 묻혔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는 부여군이 2000년에 세운 가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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