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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몽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44
한자 朴夢得
영어공식명칭 Park Mongdeuk
이칭/별칭 박영옥(朴英鈺)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5년 1월 31일연표보기 - 박몽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2년 4월 - 박몽득 청년동지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박몽득 대구노동자협의회준비위원회사건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38년 2월 19일 - 박몽득 왜관 청년동지회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42년 2월 23일 - 박몽득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 언도
몰년 시기/일시 1989년 4월 30일연표보기 - 박몽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박몽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금전동 - 경상북도 구미시 금전동
거주|이주지 남산정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청년동지회 회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박몽득(朴夢得)[1915~1989]은 1915년 1월 31일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금전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으로 이주하여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항일 비밀결사 대구노동자협의회에도 관여하였다. 박영옥(朴英鈺)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박몽득은 1932년 4월 이창기(李暢基)·정행돈(鄭行敦)·이두석(李斗錫) 등과 청년동지회를 결성하였다. 이창기·정행돈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친일 교유(敎諭)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하였고, 이두석은 광주항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서울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각각 퇴학당한 상황이었다. 청년동지회는 주로 농촌 계몽운동과 소비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강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박몽득은 기독교 신자 21명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대구노동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였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른바 대구노동자협의회준비위원회사건으로 체포된 박몽득은 4월 10일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대구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박몽득은 1938년 2월 19일 ‘왜관 청년동지회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9년 10월 25일에 대구지방법원 검사국[현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었으며,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박몽득은 1989년 4월 3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몽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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