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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시에 2012년 8월 13일 내린 기록적인 폭우. 2012년 8월 13일 최고 444㎜의 폭우가 단시간에 군산시 일대에 집중되어 산사태와 침수 피해를 입었다. 2012년 8월 13일 전라북도 지역에는 군산 국가 산업 단지 444㎜를 비롯해, 군산시 273㎜, 익산시 함열읍 245㎜, 완주군 216㎜, 변산 164㎜, 장수군 144㎜, 전주시 121㎜, 익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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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전라북도 군산시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운동. 3·1운동 당시 군산에서는 영명 학교 학생들의 교사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이어서 시내 각지에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이 발생하였다. 특히 1919년 3월 30일 제1차 만세 운동 관련자들의 공판을 앞두고 군산과 옥구 군중의 야간 시위는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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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22일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주의 항쟁. 1960년 4월 19일 전국의 남녀 고등학생 주도로 일어난 반독재 민주 혁명으로 ‘4·19 의거’, ‘4월 혁명’으로도 불린다.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대통령·부통령 선거는 야당 선거 위원들이 정치 깡패들에게 폭력을 당하는가 하면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는 등 자유당의 부정이 극에 달하였다.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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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있었던 전쟁의 양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장장 3년 1개월의 동족 상잔 비극이 벌어졌던 6·25전쟁, 해방 후 5년 만에 일어난 참변은 민족 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다. 60년이 넘도록 휴전이 지속하고 있으며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6·25전쟁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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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을 계기로 전라북도 군산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이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일. 1945년 8월 15일 중대 뉴스가 발표된다는 예고에 식민지 백성은 숨죽이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심한 잡음과 함께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 그것은 뜻밖에도 일본 천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찾아온 광복이었다. 광복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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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중심 인물 우재룡(禹在龍)[일명 우리견]이 군산 지역 광복 회원들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건. 우리견은 우재룡(禹在龍), 김재수(金在洙), 김재서(金在瑞)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의병 대장, 광복회(光復會), 주비단(籌備團) 등 독립 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군산과 각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광복회에서 우리견은 지휘장을 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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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빌린 차관을 갚기 위해 1907년~1908년 군산 지역 객주 상회사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운동.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 설치 이후 한국의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차관 1,300만원을 상환하기 위해 1907년(융희 1) 2월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 신문』·『대한 매일 신보』·『제국 신문』·『만세보』 등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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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30일 군산경마장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 일제는 1927년 가을 군산 경마 구락부 소속 미와사키[宮崎] 농지 2만 1천 평[지금의 팔마광장 부근]에 전국 최초 공식 규격 경마장을 조성하였다. 1927년 당시 국내에는 공인된 경마장이 경성[서울], 평양, 대구, 부산, 군산, 신의주 등 여섯 곳뿐이었다. 경마 대회는 1년 중 벚꽃 개화 시기와 단풍철 두 차례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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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1919년 3월 23일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운 사건. 군산은 신지식과 문물이 발달한 곳이면서도 동시에 일제 침략의 교두보였으므로 1919년 3·1 운동이 호남 지역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였다. 1919년 3월 5일 영명 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된 독립 만세 운동이 있은 후 군산 공립 보통학교의 학생들도 만세 운동 시위를 계획하였다. 군산공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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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낙합정미소 매가리 직공들이 일본인 공장주의 일방적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임금 인하 철회를 요구하며 일으킨 파업. 일제 강점기 정미소 직공들은 일의 성격에 따라 매가리공과 미선공(米選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매가리공은 벼를 매통에 갈아서 왕겨만 벗기고 속겨는 벗기지 않고, 그 쌀을 가마니에 묶어 짊어지는 일을 하던 남자 노동자들을 말한다. 미선공은 정미소에서 도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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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미곡이 수탈된 양상. 일제 강점기 군산은 미(米)의 군산이라는 별칭으로 통하기도 하였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비옥하고 넓은 평야에서 생산된 미곡들이 군산에 집산되어 일본으로 수탈되었기 때문이다. 미곡 수탈은 개항 이후 일본 상인과 자본들이 군산에 집중되며 시작되었다. 병합 이후에는 회사령, 객주 취체 규칙 시행으로 한국인 객주들의 활동과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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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가 1972년 황금사자기 고교 야구 대회에서 우승한 일. 군산 상고 야구부는 1972년 황금사자기 야구 대회에서 우승하여 역전의 명수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1970년대 한국의 고교 야구에 대해서 사람들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또는 군웅 할거(群雄割據) 시대라고도 했다. 『동아 일보』와 대한 야구 협회가 공동 주최한 황금사자기 쟁탈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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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행정 제도 개선·학교 설립·기관 유치 등과 같은 지역의 이해 관계 및 발전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지역 주민의 의견을 듣기 위해 전라북도 군산에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개최되었던 집회. 3·1 운동 이후 1920년대에 문화 정치 시작과 사회 주의 사상 유입으로 인해 군산에서는 부민 대회(府民大會)가, 인근 옥구·임피 지역에서는 면민 대회(面民大會)와 같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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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군산우마차조합원이 일으킨 화물 운반 거부 파업. 군산우마차조합은 군산 우차 조합과 군산 하차 조합이 병합하여 명칭이 개칭된 단체로 군산 하마차 조합이라고도 불린다. 군산 하마차 조합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주요한 이유는 현실과 맞지 않은 낮은 수준의 임금이 문제였다. 군산우마차조합에서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군산 운송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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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시민들이 입학난 해소를 위해서 제2공립보통학교 설립을 추진한 시민 운동. 일제 강점기 군산은 2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였으나 한국인을 위한 보통 학교는 오직 한 곳만 있어서 입학난이 심각했다. 이에 1927년 4월 19일 군산의 각계 각층의 한국인들이 협력 단결하여 군산제2공립보통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2년 간의 활동 끝에 192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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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철도노동회 회원을 중심으로 일본인 운송업자들의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그 해결을 요구하여 일어난 파업. 개항 이후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의 집산지가 된 군산항, 화물 수송을 위해 개통된 군산선, 일제의 자본 축적을 위해 설립된 공장들은 군산 지역의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는 기존 농민층의 이탈을 촉진시키고 새로운 노동 계층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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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군산철도노동회에서 사용하던 회관을 건물주 이중기가 비워달라는 요청에 맞서 대책을 세워 대응해 나갔던 사건. 군산철도노동회는 박용(朴湧)의 철운 조합(鐵運組合)과 이동화(李東和)의 운수 조합(運輸組合)이 철도 노동 운동 단결을 목적으로 1924년 5월 26일 합병하여 설립된 사회주의 노동 운동 단체이다. 1931년 3월 해체되기 전까지 군산 노동 연맹회의 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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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년(문무왕 16) 11월에 현재의 전라북도 군산시 금강 하구 유역 일대에서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싸운 전투. 신라와 당이 676년(문무왕 16) 11월에 금강 하구 유역 일대에서 싸운 전투로 당은 신라를 병합한 후 한반도 전체를 차지할 야욕을 가짐에 따라 신라는 당과 전쟁을 벌였다. 이 기벌포 싸움에서 당은 대패하여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신라와 당나라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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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황해도 앞바다에서 조업 중 북한에 피랍됐다 귀환한 군산 출신의 서창덕이 간첩으로 누명을 썼다가 무죄 선고를 받은 사건. 승룡호 선원이던 서창덕(徐昌徳)이 1967년 5월 조업 중 납북되었고 9월에 귀환했는데, 17년이 지난 1984년 전주 보안대가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수사권이 없음에도 별다른 혐의없이 체포하여, 불법 구금 및 구타 등 가혹 행위를 가하여 자백을 이끌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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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 개복동에서 2002년 1월 19일 성매매 업소 내에 전기 합선으로 불이나 건물에 있던 여 종업원 14명과 지배인 1명 등 15명이 숨진 사건. 전라북도 군산시 개복동 7-13번지의 지상 2층 건물[연면적 161.4㎡]에서 2002년 1월 화재로 15명의 생명을 앗아간 화재 참사 사건이다. 2002년 군산 개복동의 대가·아방궁 유흥 주점[성매매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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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전라북도 지방의 대표적인 민족 운동, 계급 운동 단체인 전북 민중 운동자 동맹의 기관지인 『민중운동』 편집 위원들이 탄압 받았던 사건. 민족 해방, 계급 해방을 목표로 하는 전북 민중 운동자 동맹은 도(道)를 단위로 하는 사상 단체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되었다. 전북 민중 운동자 동맹의 기관 잡지인 ‘민중 동맹’의 사무소는 군산에 있었다. 편집 위원들이 경성에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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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전라북도 군산시 금강 하구 유역 일대에서 벌어진 백제와 나당 연합군의 전투 백제의 국정이 문란해진 틈을 이용 나당 연합군이 탄현(炭峴)을 넘어 공격하여 백제의 장군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한 뒤,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과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이 백강(白江)으로 침입하여 백제군과 싸운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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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년 8월 현재의 전라북도 군산시 금강 하구 유역 일대에서 벌어진 백제 부흥군과 나당 연합군의 전투 663년 쓰러진 나라를 일으키려는 백제 부흥군과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로, 백촌강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이 패배함으로써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이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사비를 점령하고 백제 전역에서 노략질을 벌이면서 백제인들의 반발이 일어나고, 백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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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에 있던 수심사(修心寺)가 조선 시대 폐사된 사건 조선 시대 1535년(중종 33) 양반과의 묘지 조성 문제로 시작된 사건이 크게 번져 조정(朝廷)에 의해 수심사(修心寺)가 폐사(廢寺)되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숭유 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표방하며 양반 관료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고 이에 고려 왕조 500여 년 동안 자리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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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전라북도 군산 제일 고등학교 전·현직 교사 9명을 이적 단체 조직과 간첩 행위 등으로 구속한 용공 조작 사건. 1982년 이광웅 등 군산 제일 고등학교 전직·현직 교사 8명과 한국 방송 공사[KBS] 남원 방송 총국 부장이던 조성용 등이 모여 시국 토론을 하고 4·19 혁명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의 추모제를 지낸 모임을 경찰이 나서 이적 단체로 조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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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전라북도 옥구의 일본인 이엽사 농장(二葉社農場)에서 고율의 소작료를 인하할 것을 요구하며 지역 농민 조합과 청년 단체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 3·1운동 이후 1920년에 들어서며 농민 운동은 지역 유지와 청년들을 중심으로 농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하며 전개되었다. 일본인 대농장들이 많았던 군산·옥구·임피 지역에서도 청년과 사회주의 지식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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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16세기에 군산 지역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일본인 해적의 침입 군산 지역은 14세기에 들어와 왜구(倭寇)의 극심한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14세기 중엽 이후 왜구(倭寇)가 크게 세력을 키워 한반도는 물론 중국 연해안까지 침략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와 이와 관련된 일본 국내의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14세기 중엽에 들어 원(元)이 쇠퇴하게 되자,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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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이상재(李商在)의 운구를 충청남도 한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전라북도 군산 지역 각 사회·청년단체가 펼쳤던 장례 행사. 월남 이상재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출신으로, 18세 때에 과거를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후 이장식의 소개로 박정양(朴定陽)을 만나 교우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로 인해 1881년(고종 18) 신사 유람단에서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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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중 전라북도 군산 지역으로 피난민이 이주한 사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조인으로 전선에서 포성은 멎었지만, 부모·형제가 헤어져 평생을 이산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분단의 아픔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군산도 북한과 뱃길이 가까운 항구 도시로 이산 가족[피난민]이 어느 도시보다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군산은 해방 후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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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영조 4) 3월 이인좌 등이 정권 탈취를 기도하며 벌인 난(亂)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군산 지역으로 유배 오게 된 사건. 이인좌의 난은 전국적인 내란의 성격을 띠고 있어 실제 거병 지역과 반란 주도 인물에 따라 경상도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의 난, 전라도는 박필현(朴弼顯)의 난, 충청도는 이인좌(李麟佐)의 난 등으로 불린다. 숙종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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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에서 인력거를 운행하던 인력거부(夫)들이 일본인 차주(車主)들의 일방적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일으킨 파업. 인력거는 일제 강점기 주요 교통 수단의 하나였다. 사람이 끌어 이동하는 교통 수단으로 넓은 도로는 물론이고, 크기가 작아 좁은 골목길로 이동이 가능하여 많이 이용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교통 수단인 전차·자동차·택시가 등장하면서 인력거 영업에 손실이 발생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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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발생한 일본으로 강제 징집된 노무자 1,803명에 대한 보상 요구 시위. 1945년 9월 중순경, 1,000여 명의 한국인이 군산 부청[시청] 건물을 포위하고 이노우에[井上] 부윤에게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노무자 1,803명에 대해 피해 및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 강제 징집 노무자의 배상 금액은 한 사람에 대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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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한 사건. 일본이 만주 사변을 일으킨 1931년 이후 병참기지화 했던 군산은 다른 도시에 비해 해방을 조용히 맞았다. 일본 군대[수호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1944년 5월 현재 군산[옥구군 포함]에는 1만 1095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군산을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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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례에 걸쳐 일본이 군산이 포함된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포괄적으로 포함한다. 또한 1차와 2차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1차는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부르며, 2차는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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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 늑약 이후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전개되었던 민족 운동. 군산에서는 1905년(광무 9) 을사 늑약 이후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자강운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하였다. 옥구 군산항 민단, 대한 협회 군산 지회 등의 계몽 운동 단체나 객주 상회사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교육 계몽 활동, 식산 흥업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 보상 운동과 같은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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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군산 지역에서 해병대가 벌인 최초의 상륙 작전. 군산·장항·이리 지구 전투는 1949년 4월 15일 창설된 대한민국 해병[고길훈 부대]이 6·25 전쟁에서 최초로 감행한 상륙 작전이다. 1950년 7월 초 충청남도 천안을 점령한 북한 제 13연대가 호남 지역으로 남하할 때 7월 16일 군산에 상륙한 해병대 부대가 북한의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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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군산 지역 정미소 매가리공과 미선공(米選工)들이 일본인 공장주들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일으킨 각종 파업. 일제 강점기 군산에는 조일(朝日)·조선(朝鮮)·낙합(落合)·육석(陸石)·장전(長田)·전전(前田)·반전(半田)·품천(品川) 정미소와 같은 크고 작은 정미소들이 1910년 이후 계속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 정미소가 설립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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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조선은행 군산지점 사택 건설 공사 중에 발생한 붕괴 사고. 1920년 8월 16일 조선은행 군산지점에서 사택을 신축하게 되어 기초 공사를 하던 중 파 들어가던 굴이 무너지면서 인부가 매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매몰된 조선인 인부 네 명이 사망하였다. 1920년 조선은행 군산지점에서는 사택을 신축하게 되어 매일 100여 명의 인부를 동원, 공사를 진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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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년 고려 수군이 군산 앞바다에서 왜구를 상대로 크게 승리한 해전. 우왕 6년인 1380년 진포에서 고려 수군이 처음으로 화약 무기를 사용해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1350년부터 왜구는 고려를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여 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고려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수도인 개성까지 침입하여 왕조의 근간을 흔들었다. 1380년(우왕 6) 8월 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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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군산 연해에 국적 불명의 외국배가 출몰한 사건. 우리나라 연해에서 밀무역·불법 어로·약탈을 일삼는 중국인의 배를 황당선(荒唐船)이라 하였다.황당선은 16세기 중반부터 서해 연안에 출몰하여 조선에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부터 서해에 황당선이 출몰하여 민간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조선 시대 황당선은 명·청 시기 북부의 어민들과 상선들로 16세기 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