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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52
한자 壬辰倭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 13일연표보기 - 임진왜란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8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종결
전개 시기/일시 1592년 5월 2일 - 임진왜란, 일본군 한성 점령
전개 시기/일시 1596년 - 강화 회의 결렬
전개 시기/일시 1597년 - 정유재란 발발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도요토미 히데요시|고니시 유키나가|황진|권율|선조|이순신

[정의]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례에 걸쳐 일본이 군산이 포함된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

[개설]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포괄적으로 포함한다. 또한 1차와 2차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1차는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부르며, 2차는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은 조선에 가도 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하면서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포 상륙을 시발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에 조선은 관군과 각처에서 모집된 의병 등이 총력전을 펼쳤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명(明)이 개입하여 조선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한편, 일본과의 전쟁 화의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 계속되던 강화 회의가 1596년(선조 29) 결국 결렬되면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이어졌고, 1598년(선조 31)에야 전쟁은 끝이 났다.

[경과]

1592년(선조 25) 4월 조선의 부산포에 군사를 상륙시켜 조선 침공을 단행함으로써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을 주장으로 하여 조선 땅에 상륙한 일본군은 오랜 전국 시대의 경험을 통하여 강화된 전력을 바탕으로 전세를 압도적으로 주도하면서 북상했다.

임진 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에서는 감사 이광의 주도로 관군이 동원되어 경상도와 충청도로 출동하였고, 이어서 대규모의 근왕병이 출동하였으나 용인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전라도 근왕병이 패배한 원인은 감사 이광의 무능이라기보다는 당시 동원된 병사들의 전투 능력 부족과 사기 저하, 근왕병 동원에 대한 반발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용인 전투 후 전라 병사 최원에 의하여 수 만의 병력이 동원되어 북상한 후 왜군의 호남 침공의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감사 이광은 전전적, 이정란과 함께 전주 부성의 수배 태세를 갖추고 웅치와 이치 등의 요해지에 관군을 배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금산을 점령한 왜군이 웅치를 통해 전주 부성을 공격해 오자 전라도 관군은 의병과 함께 웅치의 혈투와 안덕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이를 격퇴하여 전주 부성과 전라도를 지켜내었다. 이것이 웅치 전투인데 이때 의병장 고경명의 움직임은 금산의 왜군을 견제하여 호남 방어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웅치 전투 이후 전라도 각 지역 수령이 지휘하는 관군이 대대적으로 동원되어 금산성에 주둔한 왜군을 압박하며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금산의 왜군이 이치를 향해 공격해 오고, 이를 동복 현감 황진과 광주 목사 권율이 이치 전투에서 격퇴하였다.

이처럼 임진 왜란 초기 전라도에서는 관군이 유지되면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고, 호남의 방어는 전라 감사 이광의 지휘 아래 방어 태세를 갖추고 웅치 전투 및 이치 전투에서의 관군의 활약이 크게 이루어졌다.

[결과]

임진 왜란의 개전 초기 빠른 속도로 북상하는 일본군으로 인해 결국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후 수도 한성은 1592년(선조 25) 5월 2일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그 뒤 한성을 수복하기까지 한성부 및 그 인근의 경기도 지역 고을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임진 왜란 이전부터 군산진 만호가 관할하고 있는 군산창과 익산의 성당창이 위치하고 있어 군산 지역은 조선 후기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임진 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세미(稅米)를 보관하고 있던 군산창은 정부의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군량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1597년(선조 30) 8월 영의정 유성룡군산창의 전세미(田稅米)가 왜군에게 갑자기 탈취될 것을 우려하였고, 이러한 조정의 우려에 따라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1597년(선조 30) 9월 16일 명량해전 승리이후 쉴 틈 없이 군산도[현재 선유도] 부근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1597년(선조 30) 9월 21일 도착하였다. 『난중 일기』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은 군산도에 도착한 후 몸살을 몹시 앓았으며 가을 태풍으로 선박의 이동이 용이하지 않고 그 와중에 의주의 조정에 명량해전의 승리를 전하는 장계를 써서 올렸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군산도에서 12일 간 군산도 부근의 안전을 확인하고 떠났다. 이와 같이 군산 지역은 임진 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거둔 후 쉴 틈도 없이 올라와 순시해야 할 정도로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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