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005
한자 近代-記憶-慶山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언

[정의]

근대 경산 지역의 생활과 관련된 산업·주거 및 종교 등의 문화유산.

[개설]

경산 지역에 현존하는 근대기 산업 관련 문화유산으로는 삼성역사, 경산역하양역의 관사, 창고 및 교량 시설, 코발트 광산과 코발트 선광장 및 종사원 관사, 양조장, 청천과물조합창고 등이 있다. 건별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근대 한옥·적산가옥·우편국 또는 교육기관과 같이 공공시설에 부속된 관사 등의 주거 시설이다.

그 외에도 하양성당청천공소 등의 천주교 관련 종교 시설이 남아 있다. 이들 문화유산은 굴곡진 근대사를 경험한 경산 지역 사람들의 고통과 기쁨, 희망과 절망 등의 애환이 어려 있어 지속적인 보존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산업 시설]

근대기에 건립되어 경산 지역에 현존하는 산업 유산으로는 철도와 관련된 시설이 있다. 경산에는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며, 1917년에는 대구와 영천을 연결하는 대구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이에 현재까지 철도 시설인 역사·관사·창고·교량 등이 남아 있다.

근대기 건립된 역사는 해방 이후 모두 신축되어 옛 형태를 살피기는 어렵다. 그나마 1960년에 개축된 삼성역이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경산시 남천면 삼성리 520번지에 소재한 삼성역은 1921년 신호소로 시작하여 1926년 일반 역의 운수 영업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근래 간이역으로 격하되어 열차 운전취급 업무만 담당하고 있다.

1930년대에 역장과 역원이 사용했던 철도관사 4개 동이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3개 동만 남아 있다. 삼성역 관사는 2호 연립주택형의 일본식 목조 단층집 형태로 건립되었으며, 일부 건물은 민간에게 불하되어 현재 지역민이 거주하고 있다.

경산역 역무원 관사는 경부선이 개통된 20세기 초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경산역 인근에 3개 동이 남아 있다. 하양역 관사는 삼성역 관사와 마찬가지로 2호 연립주택형의 일본식 목조 단층집 형태이다. 현재는 두 채로 구분되어 민간에 불하되었다.

철도 관련 교량으로는 1930년대 경부선 철로상에 건립된 남천면의 구일동천교·감곡천교·대명동천교가 있으며, 1940년대 대구선 철로상에 건립된 하양읍의 조산천교·사기천교·남하천교, 와촌면의 기천천교가 있다.

경산에서 가장 유명한 산업 시설로는 평산동에 위치한 코발트 광산과 상방동의 선광장이 있다. 코발트 광산은 1937년 일본인에 의해 금광으로 처음 개발되었다. 그러다 1942년 코발트 광맥이 발견되면서 코발트 채굴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이곳에서 채굴된 코발트 원석은 삭도를 이용해 원석에서 광석을 선별하는 상방동 선광장으로 옮겨졌다.

선광장 부지는 약 10,000㎡ 규모로 수십여 기에 이르는 대형의 콘크리트 수조들로 이루어져 있다. 선광장에서 선별된 광물은 다시 삭도를 이용해서 경산역으로 운반된 뒤, 철도를 이용해 필요한 곳으로 운송되었다. 당시 경산역으로 운반된 광물을 취급하는 하역장 인부들의 숙소도 남아 있다. 이 숙소는 흔히 ‘사택마을’이라고 하는데, 해방 이후에는 경산역에 운송된 석탄 하역작업을 담당했던 인부들의 숙소로 활용되었다.

한편, 6·25전쟁 발발 초기 코발트 광산에서는 국민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수감자 등 수 천명이 학살당했다. 이들 산업 시설은 근현대 혼란기 경산 지역의 아픈 기억을 담긴 유산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 밖에도 근대기에 조성된 양조장과 창고가 남아 있다. 자인시장 북쪽에 있는 자인양조장은 1930년에 사무실, 주조장, 주거공간으로 구분되어 건립되었다. 자인양조장은 근대기 이후 자인 지역의 생활문화를 반영한 얼마 남지 않은 문화유산이다. 현재 주조장은 철거되어 사무실과 주거공간만 남아 있다.

근대기 경산 지역의 생활상을 반영한 또 다른 문화유산은 하양읍 청천리에 소재한 청천과물조합창고이다. 청천과물조합창고는 대구와 영천을 잇는 국도변에 위치해 있으며,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건립된 목재 건조물이다. 한때 이와 유사한 창고가 여러 개 있었으나 현재 청천과물조합창고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청천과물조합창고는 근대기 과수원이 밀집했던 금호강 주변 지역민의 삶을 반영한 문화유산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근대기에 건립된 소규모 산업유산으로 경산 시내에 소재한 철공소가 현존해 있다. 철공소가 위치한 곳은 일제 강점기 동안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일본인이 건립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방앗간으로 사용되었다. 근대기 이후 소도시의 생활상을 반영한 문화유산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한편, 하양읍 대학리 616-6번지가 있는 무학산 자락에는 집단농장이자 갱생농장이었던 무학농장 건물이 있다. 무학농장은 영국인 양수산나[수산나 메리 영거] 여사가 영국의 지원을 받아 하양성당 이임춘 신부와 함께 건립한 것이다. 양수산나 여사는 1960년 이래 우리나라에서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던 이들을 위해 봉사한 사회복지가이다.

무학농장은 대지 6,8603㎡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축사와 농장, 우유 가공소 및 직업여성 갱생을 위한 양장점과 미용실을 갖추었었다. 이후 폐쇄되었지만 건물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1960~1970년대 어려웠던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근래 보존과 활용에 대한 관심을 받고 있다.

[주거 시설]

근대기 경산 지역의 생활 문화를 반영하는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주거 시설이다. 주거 시설은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인이 거주한 적산가옥과 근대 시기에 건조된 한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적산가옥은 다시 농가형, 주거와 산업 혼합형, 도심형으로 구분된다. 농가형 적산가옥으로는 남산면 산양리의 예병옥 가옥과 와촌면 계당리오삼주 가옥이 전형적인 일본식 농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두 가옥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건조한 주거 공간이었는데, 모두 곳간이나 원두막 역할을 하는 2층 다락방이 건립되었다. 두 가옥은 습한 일본 기후에 적합한 2층 다락방 형태로 건물 내부에 곳간을 갖춘 전형적인 일본식 농가 건조물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주거와 산업 혼합형으로는 앞서 언급한 경산 시내의 철공소 건물이 해당된다. 도심형 가옥으로는 건축주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적산가옥이라 할 수는 없지만, 1920년대에 옛 경산읍성 내부인 서상동에 있는 일본식 가옥이 있다. 이 가옥은 이층 중탑 형식의 지붕과 건물의 형태로 보아 일본 상류계층의 가옥인 부게[武家]의 축소판으로 간주된다.

비교적 근래 멸실된 적산가옥 중에 일제 강점기 일본인 초등교육기관이었던 경산심상고등소학교의 교감관사가 경산시 서상동에 있었다. 경산심상고등소학교는 해방 이후 경산읍사무소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모텔이 들어서 있다. 경산역 부근에는 일제 강점기 우편국과 관사가 현존해 있다.

경산 지역에는 일본식 가옥 이외에 근대기 주거문화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비교적 많은 수의 근대 한옥이 현존하고 있다. 근대 한옥은 근대적 생활양식과 주거기능의 수용에 따라 전통 한옥의 평면 구성과 공간 구조상에 변화된 건축기법을 도입하여 다양한 공간과 부속된 수납공간이 발달된 특성을 보인다.

경산 지역에 현존하는 근대 한옥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가옥은 1910년대에 남산면 경리에 6개의 동으로 건축된 김진채 가옥이다. 경산시 삼남동의 안부자집은 1930년대에 건축되었다. 문채, ‘ㄱ’자로 연결된 안채, 사랑채, 별채,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부 지역의 개방형 근대 한옥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와촌면 신한리학음유거(鶴陰幽居)는 전형적인 근대 한옥 형태의 과수원 주택이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건축된 학음유거는 대문채, 사랑채, 안채,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특한 돌출현관의 형식을 갖추어 양식적 측면에서 근대 주거사의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와촌면 덕촌리에는 1930년대에 건축된 식당 건물이 있는데, 한때 서당과 한약방으로 이용되었다. 남산면 사월리의 농촌형 근대 한옥은 1935년에 건축되었는데, 현재는 안채·행랑채·외양간·사과창고가 리모델링되어 펜션으로 활용하고 있다.

경산 지역의 근대 한옥은 옛 경산읍성 자리인 경산시 삼남동삼북동 일대에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이곳의 근대 한옥은 남산면의 근대 한옥처럼 식당으로 사용되거나 일반 주거용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빈집으로 남아 있다.

많은 단골을 확보하고 있는 ‘향촌칼국수’, ‘회나무식당’, ‘종가집’ 간판의 식당은 모두 1920년대 무렵에 건축된 경산읍성 내부에 위치한 근대 한옥이다. 그 외에도 경산시 삼남동삼북동에는 공가로 남아 있는 근대 한옥 여러 채가 있다.

[종교 시설]

경산 지역의 종교 관련 근대유산으로는 천주교 하양성당청천공소가 있다. 경산 지역에서는 19세기 말엽 진량읍의 북동공소에서 미사가 진행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천주교가 널리 확산되어 1915년 하양에도 공소가 설립되었다.

하양공소는 1931년 본당과 사제관을 갖추면서 하양성당이 되었다. 붉은 벽돌의 첨탑, 아치형 개구부, 부벽, 박공지붕의 외관은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용된 건축양식을 보인다. 하양성당의 건축 양식은 초기 천주교 성당 건축양식의 일반적인 양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양성당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 여섯 번째로 건립된 성당으로 한때 청천공소, 금호공소, 청도공소, 평사공소, 진량공소, 환상공소 등을 관장하였으며, 대구, 경산, 영천을 포함한 경상도 동부 지역 천주교의 전파에 기여했다. 나아가 지역의 천주교 관련 교육기관의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

한편, 하양읍 청천리에는 예배 공간과 부속실로 구성된 장방형의 단층 목조건물로 건립된 청천공소가 남아 있다. 청천공소는 1930년대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존을 위한 노력]

경산 지역에는 근대기 생활을 보여주는 많은 수의 산업 시설, 주거 시설, 종교 시설이 남아 있다. 특히 식민지 경험과 6·25전쟁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코발트 광산, 경산의 산업 발전 과정에서 조성된 수많은 근대유산은 당시 경산 지역 사람들의 시대인식과 실천을 반영한 소중한 유산이다.

그러나 종교 시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방치되거나 원형이 변형된 상태이다. 더구나 목재 건축물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멸실될 위험이 높아 보존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안 중 하나가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다.

등록문화재는 근대 이후 조성된 문화유산 중에서 보존 및 활용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근대문화유산을 가리킨다. 등록문화재는 여러 제재와 규제를 받아야 하는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문화유산의 적절한 보존과 더불어 비교적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이 해당 문화재의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를 적절히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관광의 자원으로 활용도 모색할 수 있다. 경산 지역의 식민지 시기와 혼란기의 아픔을 간직한 코발트 광산, 선광장을 비롯한 공공기관은 적절히 보존될 때 그 역사적 의미의 올바른 전승이 가능해질 것이다.

아울러 근대기 경산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반영한 적산가옥과 근대 한옥을 보존함으로써 시민의 문화적 향유 욕구의 충족과 관광 자원으로의 활용을 도모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옛 경산읍성의 내부와 외부에 산재한 여러 채의 근대 한옥과 농촌 지역에 산재한 농가형 근대 한옥의 적절한 보존과 활용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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