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교육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405
한자 新敎育運動
영어공식명칭 New Education Movement
이칭/별칭 신교육구국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삼조

[정의]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전개된 근대 교육 수용 및 학교 설립 운동.

[개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의 요체는 ‘실력’과 ‘힘’을 길러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의 하나가 바로 신교육운동이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도 대구광문사·대동광문회·대구광학회·달성친목회·강의단·봉성광학회·영북학회·경주군교육회·영북학회·간친교육회·운산친목회 등과 같은 애국 계몽 단체가 생겨나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기독교에서도 교육 선교를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1906년(광무 10) 3월 「흥학조칙(興學詔勅)」이 만들어지자 경상북도 관찰사 신태휴(申泰休)는 「흥학훈령(興學訓令)」을 발표해 신교육 사조를 보급하고자 근대 학교를 경상북도에 설립하기 시작했다. 경산 지역에서도 근대 학교가 설립되어 민족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세워진 사립 학교는 16개교 이상이 된다.

[관민 주도 학교설립운동]

경산 지역에서 관민 주도로 세워진 최초 학교는 사립배의학교(私立培義學校)이다. 자인군수 진영렴(秦永廉)이 1908년 자인 지역 유지들과 협력해 자인군[현 경산시 자인면]에 세웠다. 설립 당시 학생 수는 70여 명이었다. 학교 운영이 어렵게 되자 전 자인군수 심의성(沈宜聲)이 종이·붓을, 전 주사 윤창섭(尹昌燮)이 논 2마지기를 기부했다. 윤창섭은 “현재 가장 급한 것이 청년 교육”이기 때문이라고 지원 동기를 밝혔다. 사립배의학교 교사 이길주(李喆柱)는 1908년 대한협회 평의원(評議員)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1년 사립배의학교는 자인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되었다.

[민간 주도 학교설립운동]

경산 지역에서 세워진 사립학교에는 자인군 지역 7개교, 경산군 지역 4개교, 하양군 지역 4개교이다.

자인군 지역에 세워진 학교는 7개교로, 포명학교(布明學校), 양성학교(養成學校), 배양학교(培養學校), 덕숭학교(德崇學校)[숭덕학교], 진명학교, 진신학교(進新學校), 당리학교(堂里學校)이다. 포명학교는 1906년 10월, 양성학교는 1906년 7월, 배양학교는 1908년 7월, 진명학교(進明學校)는 1909년 9월에 세워졌다. 양성학교는 1906년 7월 세워졌다. 1908년 당시 교장은 여석무, 교사는 남상복, 이향원, 교감은 최창섭, 사무원은 이정소이다. 학생은 40여 명이었다. 한편, 1908년 양성학교를 비롯한 다섯 학교 학생들이 연합 대운동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면, 당시 자인군에는 사립학교가 5개교 이상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포명학교는 1906년 개교 당시 학생수가 30여 명이었다. 포명학교는 1908년 6월 1일 폐교되고 1908년 8월 1일 관민 주도로 자인 지역에 세워진 사립배의학교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진신학교는 1910년 전지교회에 의해 세워졌다. 덕숭학교는 1909년 9월 자인군 북사동[현 자인면 북사리]에서 지방민이 주도해 세워졌으며, 1925년 3월 경비 부족으로 폐교했다. 지금의 용성면에 있던 당리학교는 1907년 송림교회에 의해 설립되었다.

경산군 지역에 세워진 학교는 4개 교로, 삼산학교(三山學校), 명륜학교(明倫學校), 풍진학교(豊進學校), 계동학교(啓東學校)이다. 삼산학교는 1907년 4월, 명륜학교는 1909년 5월, 풍진학교[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는 1907년 4월, 계동학교[중방동]는 1909년 4월에 세워졌다. 계동학교는 1906년 4월 이준분(李準焚), 김성율(金成律) 외 5명이 세운 보진사숙(普進私塾)을 1909년 4월 27일 학부대신 인가를 얻어 사립계동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1927년 당시 계동학교는 2학급 6년제 학교이며 생도는 43명이고, 직원은 2명, 교장은 김기양(金基陽)이었다.

하양군 지역에 세워진 학교는 5개교로, 진덕학교(進德學校), 도명학교(道明學校), 향교 부속 사립학교[명칭 불명], 보정학교(普晶學校), 계남학교(啓南學校)이다. 도명학교는 1908년 봉림동교회에서 설립했다. 진덕학교는 설립연도가 알 수 없지만, 『조선인교육사립학교통계요람』[1913]에 하양군에 있는 학교로 나오기 때문에, 애국 계몽 운동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1909년 4월 1일 향교 문묘 부속 건물을 활용하여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1911년 9월 1일 도리동 막사로 이전하고, 1911년 10월 하양공립보통학교로 개명하면서 공립학교로 전환하였다. 보정학교는 1906년 송서동교회에 의해 설립되었다. 계남학교는 1910년 동호교회에 의해 세워졌다.

[기독교 계열의 학교설립운동]

『조선인교육사립학교통계요람』[1913]에 의하면, 경산 지역에서 사립 일반학교는 없었으며, 종교계 학교 총 5개교가 있었다. 모두 기독교 북장로계 아담스(James Edward Adams)[1867-1929] 선교사가 세웠으며, 모두 보통학교[오늘날 초등학교]였다. 이처럼 경산 지역에서 근대 교육에 확산하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은 아담스 선교사이다. 아담스 선교사는 경상북도에 약 6개 학교를 세웠다. 1906년 10월 15일 대구 지역에 계성학교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5개 학교를 더 세웠는데, 나머지 학교가 모두 경산 지역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아담스 선교사가 세운 학교의 설립 과정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아담스 선교사가 소속된 북장로계가 경산 지역에서 세운 교회가 경산 지역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양군에는 진덕학교(進德學校), 도명학교(道明學校) 2개교가 있었다. 진덕학교는 조학규(曹學奎), 도명학교는 김영우(金永佑)가 교장을 역임했다. 경산군에는 계남학교(啓南學校), 계동학교(啓東學校) 2개교이다. 계남학교는 이정우(李禎雨), 계동학교는 채병문(蔡炳文)이 교장을 역임했다. 자인군에는 숭덕학교 1개교이며, 교장은 한기원(韓基元)이었다. 일본은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령」, 1911년 10월 20일 「사립학교규칙」[조선총독부령 제114호] 등을 만들어 애국 계몽 운동기 민족 교육을 위해 세워진 대다수 서당을 비롯한 사립학교를 폐교했다. 따라서 1912년 조사를 하고 1913년 발간한 『조선인교육사립학교통계요람』에 실린 학교들은 애국 계몽 운동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인교육사립학교통계요람』[1916]에는 경산 지역에 4개 학교가 있었는데, 사립계동학교, 사립보명학교, 사립진덕학교, 사립덕숭학교이다. 1915년 조사 당시 아담스 선교사가 세운 5개 학교 중 계남학교를 제외한 진덕학교·계동학교·도명학교·숭덕학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사립보통학교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사립계동학교의 교장은 이종성(李鍾城), 사립보명학교의 교장은 김영우(金永佑), 사립진덕학교의 교장은 오병기(吳炳琪), 사립덕숭학교의 교장은 윤창섭(尹昌燮)이 맡았다. 사립보통학교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교명이 변경된 학교도 있다. 도명학교는 사립보명학교, 숭덕학교는 사립덕숭학교로, 훗날에는 기독덕숭학교로 교명이 바뀐 걸로 추정된다. 경산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비인가 사립학교가 인가 사립학교로 전환한 학교 수가 많은 것은 기독교 계열의 학교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의의와 평가]

경산 지역에서 이뤄진 신교육운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근대 교육 기관이 주로 경산군자인군 일대에서 많이 세워졌다. 둘째, 경산 지역을 대표하는 애국 계몽 운동 단체 회원들이 민족 교육의 일환으로 근대 사립 교육기관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 북장로계 계통 사립 교육기관이 많이 만들어졌다. 넷째, 애국 계몽 운동기에 만들어진 사립 교육기관이 1920년대까지도 유지되었다. 민족 교육으로 만들어진 사립 교육기관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전에 폐교가 된 반면, 기독교 계열에 만든 사립 교육기관은 일제강점기에도 그 명맥을 유지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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