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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46
한자 獨立運動
영어공식명칭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이칭/별칭 항일운동,항일투쟁,국권회복운동,민족해방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지영

[정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한 경상남도 밀양 지역민들의 항일운동.

[개설]

일제강점기 밀양 지역사회에서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극복하고 민족 자주성을 회복하며,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대 비밀결사 조직과 3·1운동]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밀양에서는 다양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대종교 지도자로써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윤세복(尹世復), 윤세용(尹世茸) 등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였고, 김원봉(金元鳳) 등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합류하였다. 밀양 내에서는 일합사(一合社)와 연무단(練武團) 등과 같은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된 가운데 밀양에서는 3월 초부터 4월 초까지 한 달 이상 만세 시위가 지속되었다. 3월 13일 밀양시장에서 일어난 첫 시위를 비롯하여 부북면(府北面) 춘화리(春化里), 청도면(淸道面) 인산리(仁山里) 등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단장면(丹場面)에서는 4월 4일 태룡리(台龍里) 시장에서 표충사(表忠寺) 승려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밀양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하였는데, 유교와 기독교, 불교 등 지역 내 종교 조직들도 총동원되었다. 한편 노상직(盧相稷), 박상윤(朴尙允) 등 밀양 출신의 일부 유림들은 곽종석(郭鍾錫),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도한 파리장서에 이름을 올렸다.

[의열단의 결성과 활동]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 이후 해외로 독립운동 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더욱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성[吉林省] 바후먼[把虎門] 밖 중국인 반모(潘某)의 집에 모인 김원봉 등은 밤을 새워 가면서 숙의한 끝에 그 이튿날인 10일 새벽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였다. 창단 당시의 단원으로는 밀양 출신의 청년들과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청년들이 두 축이었는데,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奎)가 고문으로서 지도하였고,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등 13명이었다. 단장에는 김원봉이 선출되었다.

의열단의 독립투쟁 노선과 행동강령은 1923년 단재 신채호가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의열단의 주요 활동은 밀양·진영 폭탄반입사건, 부산경찰서 투탄의거,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상하이[上海] 황푸탄[黃浦灘] 의거, 다나카[田中] 대장 저격의거, 종로경찰서 투탄 및 삼판통(三坂通)·효제동(孝悌洞) 의거, 도쿄[東京]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투탄의거 등이다.

[1920~1930년대 대중운동]

1919년 3·1운동 이후 일반 민중의 역량이 크게 성장한 가운데 1920~1930년대 밀양 지역에서는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반일적 성격의 대중운동이 크게 발달하였다. 1919년 밀양구락부가 설립된 이래 밀양청년회, 밀양기독청년회, 삼랑진청년회, 밀양여자청년회 등 각종 청년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청년들은 지역 유지들과 함께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근대적 교육기관과 야학 설립, 각종 강연회와 문화행사 개최 등 지역민들을 계몽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에는 밀양청년연맹, 1928년에는 밀양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또한 1927년에는 신간회 밀양지회가, 1928년에는 근우회 밀양지회가 창립되었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 등의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지주제가 강화된 가운데 밀양의 조선인 농민들은 몰락 일로에 있었다. 소작인으로 전락하여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던 조선인 농민들은 안정적인 소작권 확보와 소작료 인하, 지조와 각종 공과금의 지주 부담 등을 요구하며 항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내내 전개되었던 수리조합 반대 투쟁과 1927년의 국농소(國農沼) 소작쟁의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공업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밀양에서는 노동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는 않았으나 밀양화공동맹(密陽靴工同盟), 밀양노우회(密陽勞友會), 밀양합동노동조합(密陽合同勞動組合) 등의 노동자 조직이 결성되면서 수차례의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1930년대 학생운동]

3·1운동 이후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민족운동, 사회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학생운동도 급속히 발달하였다. 밀양에서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1922년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며 동맹휴학을 일으켰고, 밀양공립농잠학교 학생들은 1927년과 1930년 학교 당국과 일본인 교사의 부당한 조치에 저항하는 조직적인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동맹휴학 투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밀양 지역 학생들은 학생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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