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586
한자 李擢英 征蠻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1598년연표보기 - 이탁영 『정만록』 작성 시작
편찬 시기/일시 1602년연표보기~1603년연표보기 - 이탁영 『정만록』 편찬 시작
간행 시기/일시 1654년 이후 - 이탁영 『정만록』 계하본 『정만록』 간행 추정
간행 시기/일시 1959년 - 이탁영 『정만록』 석판본 『효사재정만록』 간행
문화재 지정 일시 1986년연표보기 - 이탁영 『정만록』 보물 제880호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541년연표보기 - 이탁영 출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10년연표보기 - 이탁영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6월 29일 - 이탁영 『정만록』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보물 지정 번호 삭제
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서부리 220]
성격 일기
저자 이탁영
권책 2권 2책
규격 23.5㎝[가로]|31.7㎝[세로]
권수제 정만록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제880호

[정의]

임진왜란 때 밀양 관련 기록이 있는 이탁영의 조선 후기 일기.

[개설]

이탁영(李擢英) 『정만록(征蠻錄)』임진왜란 때 경상감사의 참모로서 경상감영 영리(令吏)로 근무한 이탁영(李擢英)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작성한 일기이다. 임진왜란 관련 기록의 가치 때문에 1986년 10월 15일에 보물 제880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보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저자]

이탁영경주이씨(慶州李氏)로 자는 자수(子秀), 호는 반계(盤溪), 효사재(孝思齋)이며, 1541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출생하였다. 1565년(명종 20) 처음으로 경상감사의 영리로 들어간 후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때에는 경상도 순찰사 김수(金睟)의 막하에서 참모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 김수가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임명된 후에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1년까지 영리직을 수행하였다. 이후에는 아들들인 이정란과 이정훈이 직역을 이어받았다. 1610년 사망하였으며, 뒤에 중추부사(中樞副使)에 추증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정만록』임진왜란 중에 이탁영이 ‘임진변생 후일록(壬辰變生 後日錄)’라는 제목으로 작성해 두었던 것을 뒤에 다시 정리하여 편집한 것이다. 1602~1603년 당시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경상감사 이시발(李時發)에게 영남 지방의 사적을 채집하도록 했는데, 이때 이탁영도 자신의 기록을 정리하여 수찬청(修撰廳)과 감영(監營)에 제출하였다. 수찬청에 제출된 기록을 읽고 국왕이 『정만록(征蠻錄)』이라는 제목을 내렸다고 한다. 수찬청에 제출하였다가 다시 계하(啓下)된 시점은 1654년 이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탁영의 둘째 아들 이정훈(李庭薰)이 ‘둔산기사(芚山記事)’를 작성한 1649년(인조 27)에 아직 제출본이 돌아오지 않았으며, 이정훈이 사망하는 1654년(효종 5)까지 추가적인 언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이 임진왜란 관련 기록들을 수집할 때, 관련 자료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출판이 이루어졌다. 이때 여러 자료 중에 『정만록』도 포함되었다. 이에 초고용으로 작성된 『정만록』의 일부를 필사한 『용사일록(龍蛇日錄)』과 국왕이 열람한 후 다시 내려보낸 『계하 정만록(啓下征蠻錄)』이 각각 텐리대학교[千理大學校] 이마니시문고[今西文庫]와 교토대학교[京都大學校] 가와이문고[河合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해방 뒤에는 후손들이 개편하여 간행 작업을 하였는데, 『효사재 정만록(孝思齋征蠻錄)』이라는 제목으로 6권 3책의 석판본(石板本)을 1959년 간행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판본 외의 판본들은 내용의 일부만을 발췌 수록하거나 이탁영의 행적을 추숭하기 위한 자료를 추가로 수록하였는데, 권책 구성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형태/서지]

보물로 지정된 『정만록』은 당시 공문서로 사용하던 닥나무 종이[楮紙]의 이면을 뒤집어서 기록한 필사본 형태인데, 크기는 가로 23.5㎝ 세로 31.7㎝이다. 보물로 지정된 판본 외에도 3종의 이본(異本)이 현재까지 전한다.

[구성/내용]

『정만록』은 2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乾)권 149쪽, 곤(坤)권 186쪽의 분량이다.

건권에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여러 관리들의 명단이 적혀 있으며, ‘임진변생 후일록’이라는 제목 아래 전황에 대해 보고 들을 바를 일기로 기록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내용 중에는 전쟁 발발 초기 경상감사 김수(金睟)가 밀양성에 갔다가 일본군의 경상남도 양산 공격 소식을 듣고, 도내에 군사들을 징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사실과 좌병사 이각(李珏)이 밀양성 함락 소식을 듣고 도망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밀양부사 박진의 황산성 전투도 묘사되어 있다. 또 포로로 잡혀 갔던 경상남도 밀양 사람들이 한양 부근까지 끌려갔다가 일본군이 명나라 군사의 지원 소식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를 틈타 탈출한 이야기,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과 김지휘(金指揮)가 강화 회담을 위해 경상남도 밀양에 들어온 사실 등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전쟁이 발발한 1592년은 매일 기록을 남겼지만, 1593년부터 1598년까지는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곤권에는 기록을 남기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임진왜란 7년간의 중요한 교서(敎書), 통문(通文), 격문(檄文) 등을 기록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수록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순한 일본인인 항왜(降倭)[이름 連汝文]에 대한 문초(問招) 자료나 중국인 허의후(許儀後)에 대한 보고 자료는 외국 인물과 관련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정만록』은 경상도의 공문 기록인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이 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임진왜란 기간 경상도에서 수집된 공문 기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국왕이 기록을 읽고 직접 『정만록』이라는 제목을 내리고, 실록에도 그 내용이 채택되었다는 점에서 당대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일본군의 동태, 군량 조달, 인심의 동향, 영남·호남의 연락 관계 등에 대하여 전쟁이 발발한 임진년은 약 10일 정도를 제외하고 거의 매일 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당시의 교서, 장계(狀啓), 통문, 첩보(牒報), 치보(馳報), 격문 등을 필사하여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특히 『정만록』은 중인(中人) 아전의 관점에서 작성된 글이라는 점에서도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남인(南人) 상관을 모신 영리로서, 전쟁의 최전선인 경상감영과 경상감사의 입장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또 임진왜란 당시의 부대 운영과 부대 보급, 전투 상황 등 전체적인 사항을 보여주면서도, 관변 기록에서는 확인하기 힘든 이서층(吏胥層)과 실제 백성들의 전쟁 경험을 생생하게 함께 서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현장감 높은 실제 사료라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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