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직손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60
한자 一直孫氏
영어공식명칭 Iljik Sonssi|Iljik Son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노규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일직 - 경상남도 안동시 일직면
입향지 일직손씨 입향지 -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일직손씨 세거지 -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성씨 시조 손응
입향 시조 손관

[정의]

손응을 비조로 하고 손간과 손세경을 중시조로 하며 손관을 입향조로 하는 밀양 지역의 세거 성씨.

[연원]

일직손씨(一直孫氏)안동손씨(安東孫氏)라고도 칭(稱)하며, 비조는 고려 현종 때 중국 송(宋)나라의 난세를 피하여 우리나라에 귀화한 손응(孫凝)이다.

문헌에 의하면 손응의 본성(本姓)이 순씨(荀氏)였는데 고려(高麗) 현종(顯宗)[재위기간 1009~1031]의 이름이 순(詢)이었으므로 그 음(音)이 같다고 하여 손씨(孫氏)의 성을 하사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고려 때 장군을 지낸 손간(孫幹)과 손세경(孫世卿)을 중시조로 하였고, 복주(福州)[지금의 안동군 일직면 송리동]에 자리 잡아 살면서 본관을 일직(一直)으로 삼게 되었다.

득관조(得貫祖)는 고려 충목왕 때 복주부원군(福州府院君)에 봉하여진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이다. 손홍량은 1286년(충렬왕 12) 또는 1287년 안동군(安東郡) 일직면(一直面) 송리(松理)에서 출생하여 21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忠肅王)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내고 충정왕(忠定王) 때는 복주부원군에 봉하여졌다. 그 후 공민왕(恭愍王) 때 여섯 임금을 섬긴 충신이라 하여 ‘충정이 하나같이 곧은 사람이 늙을수록 나라 위한 마음이 더하도다[子誠一直人 老而益篤]’라는 어시(御詩)와 함께 정평(靖平)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또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축하연에서는 임금이 손수 그린 초상화와 지팡이를 하사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이후 안동 타양서원(陀陽書院), 밀양 혜산서원(惠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손씨 가문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거나 성과 이름을 숨기고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으로 사라지는 등 서울 정계를 떠났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정평공의 증손자로 진성[단성]현감을 지낸 손관(孫寬)이 1410년(태종 10) 외가인 승벌[용평]로 이거함으로써 비로소 밀양 입향조가 되었다. 오늘날 밀양 산외면 다원리(茶院里)를 비롯한 영천(永川), 김해(金海) 등지에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손관의 아들 손조서(孫肇瑞)는 3세 때 아버지를 따라 밀양에 와서 성장하여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을 거쳐 봉산군수(鳳山郡守)로 나갔다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 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적과의 싸움에서 눈부신 훈공을 남긴 손처눌(孫處訥)과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지내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손린(孫遴)이 유명하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필억(孫必億)의 아들 손명대(孫命大)는 숙종(肅宗) 때 선전관(宣傳官)과 진도군수를 지내고 영조(英祖) 때 역신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하였으며 훈련도감별장(訓練都監別將)과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를 역임하여, 현감을 지낸 손처신(孫處愼), 좌랑(佐郞) 손단(孫湍) 등과 함께 학문과 도덕의 전통가문인 일직손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안동손씨는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우선 손순무의 후예 중 손경헌(孫暻憲)의 아들 손일민(孫逸民)은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환인현에 동창학원을 설립하였고, 1919년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을 창단했으며, 1937년 임시정부 요원으로서 무장투쟁을 벌이다 1940년 중경 기강(綦江)에서 병사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손일민의 최후를 기록하였고, 정부는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손일민의 6촌형 손기현(孫基賢)은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환인현 한교공회 외교원으로서 활약하다가 안동현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국내 송환 후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6년 손기현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손일민손기현다죽리 죽서 출신이다. 손일민의 족제(族弟) 손기욱(孫基郁)3·1운동 당시 태룡리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구금되었고, 1920년 손종헌(孫琮憲)은 족질(族姪) 손기욱의 권유로 흥업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의 여독으로 별세하였다. 정부는 2019년 손기욱에게 건국포장을, 손종헌에게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손기욱손종헌단장 안법리 출신인데, 산외면 다죽리 면사무소 앞에 회당 손일민 기념비가 있다.

또 손순욱의 후예로 손필원(孫必遠)의 7세손인 손경헌(孫庚憲)안법리 안포동에서 태어나 1907년 대한협회 밀양군 책임자로 민족사상을 고취하였고, 1913년 만주 환인현으로 이주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아 지원하였으며, 정부는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손경헌의 족질이자 손규원(孫奎遠)의 증손자 손기석(孫基錫)산내 원서리에서 태어나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된 뒤 가혹한 고문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고, 정부는 2011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산외면 다죽리 죽서 입구 길가에 성하 손경헌 사적비가 있다.

학교법인 밀성학원 전 이사장 손태걸(孫泰杰), 석하 안종덕의 증손서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손태곤(孫泰坤), 연극인 손숙(孫淑)도 죽서 출신이다.

[입향 경위]

안동손씨산외 다죽리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데, 손호(孫顥)가 16세기 때 세거지 용성[용평]에서 다원[죽서]으로 이거하였기 때문이다. 또 손흘(孫紇)의 3남 손지겸(孫智謙)은 단장 미촌리 구미로, 손즙의 4남 손제겸(孫悌謙)은 산내 송백리 양송정 서당마로, 손진갑은 영조 때 산내면 송백리 미라로 이거하였다. 손즙의 7세손 손달원(孫達遠)·손한원(孫翰遠) 형제가 구한말 전후에 단장 법흥리 법산으로, 손즙의 9세손 손용헌(孫瑢憲)·손기복 부자가 단장 안법리 안포동으로, 손작의 6세손 손건영(孫建永)이 조선 말에 산내 용전리 용암으로 각각 이사하였다. 그리고 손필항의 후손 중 손진극(孫鎭極)의 3남 손서룡(孫瑞龍)은 상동 가곡으로 이사하여 거주하였고, 손량섭(孫亮燮)과 손창헌(孫昌憲)은 산내 원서리 원당으로 옮겼다.

[관련 유적]

사적으로는 용평동 장선의 문루가 심경루(心鏡樓)인 용호정(龍湖亭), 산외 다죽리 죽서의 격재 손조서 신도비·혜산서원(惠山書院)·다원서당(茶院書堂)·이이정(怡怡亭)·양진당(養眞堂)·동산정(東山亭)·죽계서당, 산내 송백리 양송정 서당마의 영언재(永言齋)와 대촌의 손제겸 유허비, 용전리 용암마을[하촌]의 삼우당(三友堂)·원서리 원당혜남정(惠南亭), 산외 엄광리 다촌[죽촌]의 광산재(光山齋), 단장 미촌리 구미칠산정(七山亭)·구산정(龜山亭), 삼랑진의 용전리 직전마을 벽소정(碧疎亭)과 우곡리 염동의 사은재(泗隱齋)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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