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94
한자 任昌淳
이칭/별칭 청명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기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4년 5월 30일연표보기 - 임창순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7년~1933년 - 임창순 충청북도 보은군 관선정에서 한학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임창순 대구사범학교 전임 강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임창순 동양한의과대학 전임교수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임창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전임 교수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60년 4월 25일 - 임창순 4·19혁명 여파로 발생한 교수 데모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62년 - 임창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활동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해직
활동 시기/일시 1963년 11월 3일 - 임창순 태동고전연구소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64년 - 임창순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활동 시기/일시 1971년 - 임창순 문화부 문화재 위원 위촉
활동 시기/일시 1976년 - 임창순 한국고등교육지원재단의 지원으로 한문 교육 연수 과정 운영
활동 시기/일시 1979년 - 임창순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에 지곡서당을 세우고 태동고전연구소 이전
활동 시기/일시 1979년 - 임창순 보관문화훈장 수여
활동 시기/일시 1985년 - 임창순 한림대학교의 태동고전연구소 인수로 대학 산하 연구소로 운영
활동 시기/일시 1985년 - 임창순 문화부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95년 - 임창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명예 문학 박사 취득
활동 시기/일시 1998년 - 임창순 청명문화재단 설립
몰년 시기/일시 1999년 4월 12일연표보기 - 임창순 별세
출생지 법구실마을 -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
학교|수학지 선병국 가옥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
활동지 성균관대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명륜3가 53-21]
활동지 지곡서당, 태동고전연구소 -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 11-1 지도보기
성격 교육가|한학자
성별
대표 경력 성균관대학교 교수|태동고전연구소 초대 소장|문화부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정의]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자이자 한학자.

[개설]

임창순은 1914년 5월 30일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난 한학과 금석문의 대가이자 1963년 설립한 태동고전연구소를 통하여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문 강좌를 개설한 대표적인 한학 교육자이다. 임창순은 1960년 4·19혁명 당시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4·25 교수 데모에 앞장섰다.

[가계]

임창순(任昌淳)[1914~1999]의 호는 청명(靑溟)이다. 아버지는 임원재(任元宰), 어머니 김영례(金永禮)이다. 1914년 5월 30일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의 법구실마을에서 삼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임창순의 집안은 유림 척사학파 계열에 속하였다고 전해진다.

[활동 사항]

임창순은 4세 때 할아버지 임경호(任敬鎬)로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14세에는 충청북도 보은군에 있는 관선정서당에서 6년 동안 겸산(兼山) 홍치유(洪致裕)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후 생계 문제로 인하여 관선정서당에서 나와 대구에서 막노동직에 종사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서당에서 쌓아온 한문 및 국사·국어에 대한 교양을 바탕으로 중등 교원 자격 시험에 합격하여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후 경복중학교·대구사범대학교·대전중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한의학과의 전신인 동양한의과대학에 전임 교수로 부임하였고, 1953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임창순이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당시 4·19혁명이 발발하였고, 그 여파로 1960년 4월 25일 교수 데모가 일어났다. 이때 임창순은 교수 데모에 앞장서서 성명서에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라는 항목을 삽입하였으며, 플래카드에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문구를 직접 썼다. 4·19혁명 이후에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 ‘통일방안심의위원’으로 참여하였는데, 5·16쿠데타 직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었으며 성균관대학교에서 해직되었다. 또한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과 연루되어 한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63년 11월 3일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동에 태동고전연구소를 창설하여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문 강좌를 개설하였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을 받아 1976년에는 매년 10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며 한문 교육을 위한 연수 과정을 운영하였다.

1979년에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경기도 양주군 수동면 지둔리]에 지곡서당을 설립하고 태동고전연구소를 이전하였다. 1981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이 종료된 이후에도 장학 제도와 한문 교육은 지속되어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그러다가 1985년 한림대학교의 제안으로 태동고전연구소 운영을 한림대학교에서 전담하게 되었고, 임창순은 자신이 마련한 토지와 가옥 및 서적 일체를 무상 기증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임창순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국학·동양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한학을 교육하였다.

한편 1971년에 문화부 문화재 위원으로 위촉된 이래 1985년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서지학회를 재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하며 학술지 『서지학보』를 발간하였다. 1998년에는 개인의 재산을 모두 출연하여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민족 문화의 올바른 계승 발전을 위한 연구 사업의 지원과 정기 간행물 발간 등 여러 활동을 전개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임창순은 금석문에 대한 저서 『한국금석집성(韓國金石集成)』을 집필하였고, 한학 교육과 관련한 『당시정해』와 『한문강좌』를 저술하였으며, 그 외에도 ‘민족문화추진회 고전번역사업’에 참여하여 『동문선(東文選)』을 공동 번역하였다.

임창순은 행서와 초서의 대가로도 손꼽히는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해서 『한국현대서예사』 등의 서예와 서예사에 관한 저서를 남겼으며, 1998년에는 경복궁 흥례문의 상량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다.

[묘소]

한학 교육과 민족 문화의 올바른 계승에 힘써 온 임창순은 1999년 4월 12일 별세하였다. 장례는 임창순의 유지에 따라 화장으로 치러졌으며, 유골은 지곡서당과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에 뿌려졌다.

[상훈과 추모]

임창순은 1979년 보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고, 1995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의 명예 문학 박사를 받았다.

1999년 임창순이 사망한 이후 청명문화재단에서는 임창순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하여 한국학·동양학 관련 연구자를 대상으로 ‘임창순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학문의 발전을 위하여 연구 지원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