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과 진경문화의 산실, 석실서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001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채용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를 배출한 서원.

[개설]

석실서원(石室書院)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영수였다고 할 수 있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같은 시기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상헌의 형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었다. 석실서원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에 1656년(효종 7) 건립되었다. 석실서원은 17세기 조선 후기 정치·사회·문화·예술 방면에서 서인(西人) 노론(老論)의 근기(近畿) 지역에서의 주요한 기반이었으며, 조선 시대에서도 손꼽히는 서원 중 하나로서 영향력이 양주 및 서울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에 걸쳐 있었다.

[석실서원 건립의 시대적 배경과 그 위상]

석실서원이 남양주 지역에 건립된 이유 중 하나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의 선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상헌김상용의 조상은 원래 경상도 안동에 세거하던 가문이었지만, 증조할아버지인 평양서윤(平壤庶尹) 김번(金璠)이 남양주의 입향조(入鄕祖)가 되면서부터 오늘날의 남양주 지역에 선산을 조성하였고, 그 이후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명문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다. 특히 김번의 장인이 세조(世祖)와 성종(成宗)의 공신을 배출한 남양 홍씨(南陽 洪氏) 가문의 홍걸(洪傑)이었는데, 바로 처가의 선산이 남양주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안동 김씨 가문이 남양주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가던 이른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을 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김상헌의 할아버지인 김생해(金生海)가 성종의 왕자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딸에게 장가를 가면서 안동 김씨 가문의 경제적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중앙의 왕실 및 귀족 세력과 혼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안동 김씨는 대표적인 명가(名家)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후 김생해의 손자들인 김상용김상헌이 각각 문과 급제 후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이후 척화파의 영수가 되었고, 효종(孝宗) 대에는 북벌(北伐) 정국이 이루어지면서 대로(大老)로 추앙받는 인사가 되었다. 효종 연간의 정국은 외적으로는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기 위해 북벌을 추진하고, 내적으로는 대동법(大同法)을 추진함으로써 민생 안정을 꾀하는 데 주력했다. 이 가운데 북벌의 상징으로 김상헌이 추앙되었고, 이를 계승한 인물이 바로 김상헌의 문인이었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었다.

이후 남양주 지역의 석실은 근기 지역 서인 노론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곳으로서 그 위상이 다져지게 되었고, 서원이 건립되자 석실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안동 김씨 청음 김상헌 가문은 후손 중에 영의정 등 재상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면서 명문가로서의 위상을 이어 나가는 한편, 순조(純祖)의 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헌종(憲宗)의 왕비 효현왕후(孝顯王后), 철종(哲宗)의 왕비 철인왕후(哲人王后) 3명의 왕비를 배출하면서 조선 후기 대표적인 외척 세도 가문이 되었다.

[석실서원의 건립 과정과 규모]

석실서원의 건립 논의는 1654년(효종 5)에 시작되었다. 당시는 김상헌 사후 2년 뒤였는데, 양주 지역 유생을 비롯하여 당대 명사 이경석(李景奭) 등 중외의 사대부들의 건의로 시작되어 창건을 하게 되었다. 재정적 여건이 어려웠던 탓에 묘우(廟宇)와 재실(齋室)을 완성하는 데에만 2년의 긴 공역 기간이 소요되었고 1656년(효종 7)이 되어서야 일단락될 수 있었다. 이후 강당과 동재(東齋), 서재(西齋) 등의 건물이 하나씩 추가되어 완공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의 석실서원은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에 있었다고 한다. 율석리에는 김상헌 묘김상헌의 선조 등 묘소가 밀집하였다.

효종 승하로 일어난 1차 예송에서 김상헌의 제자 우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승리하고서 집권한 뒤인 1663년(현종 4) 양주에 살던 유학(幼學) 이추(李樞) 등이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서인계 예조판서 홍명하(洪命夏) 등의 거듭된 사액 요청으로 ‘석실(石室)’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이때 서원으로 승격되고 사액됨으로써 선산이 있는 율석리에서 미음촌(渼陰村)으로 이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현재의 석실서원터가 있는 곳이 또 하나의 ‘석실’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옮겨지게 된 것은 풍광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강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로에 의한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후 석실서원은 근기 지역에서 서인 세력의 중심 서원으로서의 정치적 위상을 다져 나가게 되었다.

석실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어 관련 문헌이나 유물 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규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창안한 겸재 정선이 그린 석실서원이 정선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미호(美湖)’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어 대략적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양주읍지』 석실서원 조(條)에 보면 서원의 원생(院生)이 20명, 재직(齋職)이 10명, 모군(募軍)이 40명이나 되는 규모였다고 한다. 석실서원의 형태나 구조는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김상헌의 5대손으로 영조 대 중반 낙론(洛論)의 종장이었던 미호(美湖)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었던 황윤석은 석실서원에 출입하였는데, 당시 석실서원의 구조와 건물의 배치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황윤석의 기록에 의하면, 석실서원의 사당은 서원의 가장 위쪽에 위치하였는데 주벽(主壁)에는 선원 김상용청음 김상헌 2위를 모시었고, 동벽(東壁)과 서벽(西壁)에 4위를 모셨는데 각각 김수항과 민정중, 이단상김창협을 모시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 옆에는 김상용의 초상화를 봉안한 영당(影堂)이 있었으며, 원생들의 교육 장소로 동·서의 강당, 숙식 장소인 동재와 서재가 있었으며 서원의 문 밖에는 원향정(遠香亭)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서원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석실서원은 그 터만 남아 있어 원형을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석실서원의 위상과 추배 인물]

석실서원은 당초 김상헌김상용만을 모신 서원이었다. 하지만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1697년(숙종 23) 김상헌과 송시열의 북벌대의(北伐大義)를 계승했던 노론의 주요 인사들이 추가로 배향되기 시작하였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이 배향되었다. 김수항김상헌의 손자이면서 송시열의 문인으로 노론의 영수였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당시 송시열과 함께 사사된 인물이다. 1713년(숙종 39)에는 김수항의 2남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도 배향되었다. 후일에는 낙론(洛論)의 종장(宗匠) 김원행김원행의 아들로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지낸 김이안(金履安) 및 순조 비 순원왕후의 아버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도 배향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김창협은 1695년(숙종 21) 즈음부터 석실서원에 있으면서 제자를 많이 양성한 공로로 배향되었다고 한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김창협의 제자가 되어 석실서원에 와서 김창협의 학설을 들었고 석실 일대를 그렸다고 한다.

석실서원의 정치적 위상은 숙종 연간 집권 세력이 국왕에 의해 교체되는 환국을 겪으며 서인 내 노론의 근기 지역 근거지로서 자리 잡아 가는 것이 되었지만, 그 와중에 석실서원이 붕당 사이의 정치 갈등으로 표출된 사건도 있었다. 현종 연간 사액(賜額)과 치제(致祭)가 이루어지던 과정에서 감독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남인계 인사였던 경기감사 오정일(吳挺一), 양주목사 민희(閔熙) 등이 처벌되면서 석실서원을 둘러싼 붕당 사이의 갈등이 표출된 것이 그것이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더욱 노론의 중심서원으로서의 위상을 다지게 되는데, 바로 노론에 의해 송시열이 조광조를 배향한 도봉서원에 입향이 추진되면서부터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석실서원에도 송시열의 문인들이 다수 배향되는 것도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석실서원에 배향이 추진된 김수항, 민정중, 이단상은 고향이 양주이면서 김상헌의 북벌대의를 따랐고 송시열의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노론에 의해 추진된 송시열의 도봉서원 입향 논의가 조광조의 도통(道統)을 계승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시기에 추진된 3명의 석실서원 배향 논의는 노론의 학통을 국가의 정통으로 확립하려는 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연안 이씨 이단상은 현종 즉위 이후 양주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했고, 이단상의 문하에서 김창협, 김창흡(金昌翕)청음의 후손들이 배출되었는데, 김창협이단상의 사위이기도 했다. 이렇게 석실서원에 배향된 인물들 대부분은 안동 김씨 김상헌 가문과 혼맥과 학맥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렇듯 석실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은 대부분 그 지역적 기반이 서울과 경기, 특히 양주 지역이 많았으며 후일 사상계에서 노론이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으로 나뉘어졌을 때 김창협을 종장으로 하는 낙론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다져 가게 되었다. 석실서원은 정치적 위상뿐만 아니라 문예계에서 다져졌는데, 농암 김창협삼연 김창흡의 문하에서 우리의 산천을 노래한 진경시(眞景詩)의 대가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과 진경산수화를 창안한 겸재 정선이 배출되어 조선 왕조의 고유색 짙은 진경문화를 이룩해 냈기 때문이다. 후일 김창집의 손자로 김제겸의 셋째 아들이었던 김원행이 영조 연간 낙론의 산림(山林)으로서 활동하면서 석실서원의 사상사적 위상은 더욱 굳건해졌다.

석실서원김상헌과 송시열의 학통뿐만 아니라 정관재 이단상,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등의 학통도 계승한 곳이었다. 특히 김창협김창흡 형제가 이단상과 조성기의 학문에 영향을 받기도 하여 송시열로 표방되는 노론의 정치적 명분을 확보하면서도 당면한 현실문제 해결과 변화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던 서울 경기 지역 노론의 경세론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학풍이 보다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낙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석실서원의 이러한 경향은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계 인사들과도 관계를 맺어 가는 것에서도 보여진다. 김창협의 문인 기원(杞園) 어유봉(魚有鳳)이나 세교(世交)가 있던 민진원(閔鎭遠) 등은 왕실 외척 등을 비롯하여 영조 대 중반 노론 준론의 영수 유척기(兪拓基) 등도 김창협 등과 매우 밀접했으며, 소론계 외척 조문명(趙文命)이나 탕평파의 핵심이었던 송인명(宋寅明) 등과도 혼인 등을 비롯한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정조 연간 이후 석실서원김원행의 아들 김이안과 손자 김인순(金麟淳)에 의해 강회가 이루어졌다. 김이안은 아버지 김원행 생존 때부터 석실서원에서 원생들과 교류하였으며, 김원행 사후 문집을 교정하면서 머물렀다고 한다. 김인순은 할아버지 김원행 사후 석실서원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여 서원의 원생들과 매달 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후 석실서원은 순조에서 철종을 거치면서 확립되어 간 안동 김씨 세도 정권 아래에서 이념적 뒷받침을 하는 곳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철종 연간 석실서원의 추배(追配)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김창집, 김조순까지 추배되면서 총 배향인물 11명 가운데 안동 김씨 가문의 인물이 9명이 되어 가묘적(家廟的) 성격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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