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010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헌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7월 31일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대한제국 군대 해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9월 2일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이인영 의병 부대 조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12월 초순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관동창의군 경기도 양주 도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12월 초순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13도 창의대진소 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1월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13도 창의대진소 편재 개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1월 15일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허위의 선봉대 일본군의 선제 공격으로 패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1월 28일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이인영 경상북도 문경으로 귀향, 서울 진격 작전 중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강기동 의병 부대 박순근 서울 화계사 일대,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경기도 양주군 미음면,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비금리 등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12월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이은찬 의병 부대 의병 활동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정충환 경기도 양주군 묵은면, 경기도 포천군 덕둔리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1월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이은찬 의병 부대 경기도 포천헌병분견소 수비대와 교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2월 말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이은찬 의병 부대 경기도 양주군 덕도리 인근에서 헌병과 전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3월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강기동 창의원수부 재조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3월 초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이은찬 의병 부대 경기도 양주군·포천군에서 일본군에 패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3월 중순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이은찬 의병 부대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으로 해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6월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강기동 의병 부대 경기도 양근군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7월~1909년 11월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강기동 의병 부대 일본군과 교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11월 중순 - 13도 창의군 최후의 항전, 남양주의 의병활동 강기동 의병 부대 연기우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교전

[정의]

개항기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결성되었던 13도 창의군과 경기도 남양주에서의 의병 활동.

[개설]

13도 창의군은 일본의 침탈에 저항하는 전국적인 저항 세력이었다. 서울로 진격하여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의 파기를 시도하였으나 좌절되고 말았다.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 지역은 13도 창의군의 주 무대 가운데 한 곳이었고, 서울로의 진공 작전이 실패한 뒤에도 여러 부대들이 활동하면서 저항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의병 활동의 발생 배경]

일본은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을 계기로 대한제국에 대한 침탈을 지속하고 있었다. 1904년 2월에는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간섭과 군사 기지 사용권 허가를 골자로 한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였고, 1904년 8월에는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인 재정 고문과 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무 고문을 고용하게 하여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심지어 1905년 11월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는 1906년 2월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고문 정치를 통해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정국 운영의 중심으로 삼고 있었던 궁내부의 권한을 완전히 무력화시키지는 못하였다. 황실 재산을 완전히 정리하지도 못하였고, 정부 대신들과 고종과의 밀착 관계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고종은 통감부와 친일 내각에 대항하면서 일제의 대한제국 식민지화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고종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 평화 회의에 3명의 특사를 파견하였다. 사실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이후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국제법에 의거한 주권 회복을 지속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 간섭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줄곧 대립해 왔던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졌고, 결국 주일 러시아공사가 일본 외상에게 ‘헤이그 평화 회의’에 한국이 참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하는 상황으로 귀결되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헤이그 밀사 파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의 폐위를 추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밀사 파견을 통해 일본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은 한일 간의 협약과 위반된다는 것이므로 일본은 한국에 선전 포고를 할 권리가 있다고 통보하였다. 따라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양위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결국 1907년 7월 19일 고종은 황태자로 하여금 군국 대사를 일시적으로 대리하게 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일제는 다음날인 1907년 7월 20일에 재빠르게 양위식을 실시하고 고종 황제의 퇴위를 각국에 공표하였다.

고종의 퇴위 이후 황제 양위를 반대하는 등 일제에 저항하였던 궁내대신 박영효 마저 탄핵당하자 대한제국 정부 내에서 일제에 저항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각총리 이완용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조약이 체결되었고, 다음날인 1907년 7월 25일 관보에 ‘한일협약’으로 공표되었다. 총 7개 조로 구성된 이 조약은 ①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②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③ 한국의 사법 사무는 보통 행정 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④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 하에 이를 집행할 것, ⑤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것, ⑥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용빙하지 말 것, ⑦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협약 제1항을 폐지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요컨대 대한제국 정부의 ‘시정 개선’을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 등 대한제국 내정 전반을 장악하는 것을 명문화하였던 것이다.

한편 협약문 상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각서 형식을 통해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도 결정되었다. 총 5개 조의 각서 내용 중 군대 해산은 제3조에 3개 항으로 명기되어 있었다. 육군 1대대를 존치하여 황국 수위 임무를 맡기고 나머지는 해산하며, 교육받은 사관 중 한국 군대에 잔류할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일본 군대에 부속시키며, 일본에서 한국의 사관 양성을 위해 상당한 설비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07년 7월 31일에 군대 해산 조칙과 함께 군대 해산으로 야기될 수 있는 폭동 진압의 임무를 통감에게 위임한다는 내용의 조칙이 발표되면서, 군대 해산 절차가 완료되었다. 이는 곧 해산 군인의 봉기로 이어졌고 전국적인 의병 투쟁의 서막이 되었다.

[13도 창의군의 결성]

전국적으로 의병 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에 강원도 원주군, 경기도 여주군, 경기도 지평군[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지평면·양동면·청운면·단월면 일대] 일대에서 활약하던 서울 출신의 유생 이구채와 강원도 원주 출신의 유생 이은찬이 1907년 8월 말에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이인영을 설득하여 1907년 9월 2일 이인영을 대장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 부대가 탄생하였다. 이인영의 의병 부대는 8도에 격문을 보내어 전국적으로 의병의 봉기를 독려하였으며, 그 권고에 응하여 다수의 인사들이 몰려들어 대규모 연합 의병 부대의 체제가 갖추어졌다. 이후 의병 부대의 향후 계획을 서울 공격으로 설정하고 관동 지역 의병 부대의 통합이 진행되었다. 총대장에 이인영, 총독장에 이구채, 중군장에 이은찬, 좌군장에 방인관, 우군장에 권중희, 유격장에 김해진, 좌선봉장에 정봉준, 우선봉장에 김병화, 후군장에 채상준, 운량관에 현이보, 재무장에 신창선과 민춘원, 좌총독장에 김현복, 우총독장에 이귀성 등이 임명되었다. 이 관동창의군은 훗날 결성될 13도 창의대진소의 모태가 되었다.

관동창의군은 경기도 지평과 강원도 홍천·춘천·양구 등의 지역을 통과하여 1907년 12월 초순에 경기도 양주에 도착하였다. 당시 경기도 지평을 떠나 경기도 양주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강원도 춘천과 강원도 양구 사이에서 두 차례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경기도 양주에 도착한 관동창의군은 서울 동부 및 강원 영서 일대에서 활약 중이던 허위 부대와 민긍호 부대 등을 비롯한 의병 부대와 함께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다. 13도 창의대진소는 총 48진에 1만 명의 대부대였다.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의병 부대의 의병장들은 13도 창의대진소의 대장으로 이인영을 추대하였다. 1907년 12월 초순 13도 의병 부대의 편제와 각 의병 부대의 대장은 다음과 같다.

13도 창의 창의대장 이인영, 전라(全羅)유진소 전라창의대장 문태수, 호서(湖西)유진소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嶠南)유진소 교남창의대장 신돌석, 아장(亞將) 허위, 진동(鎭東)유진소 진동창의대장 박정빈, 관동(關東)유진소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관서(關西)유진소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關北)유진소 관북창의대장 정봉준.

13도 창의대진소의 기치 아래 전국의 의병 부대를 통할할 수 있는 조직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불과 1개월 만에 13도 창의대진소의 편제를 개편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에 따라 1908년 1월에 13도 창의대진소는 13도 창의대진소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유진소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유진소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관동창의대장 방인관, 관서창의대장 정봉준 등으로 개편되었다. 조직 개편의 원인은 영남과 호남에서 각각 의병 항쟁을 전개하던 신돌석과 문태수의 부대가 경기도 양주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3도 창의대진소는 크게 강원도를 주 활동 무대로 하는 이인영 계열과 황해도를 무대로 활동한 허위 계열, 그리고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던 이강년의 의병 부대가 핵심 전력을 구성하였다. 이인영 계열의 의병장은 대부분 관동창의군 출신으로 민긍호, 이은찬, 이구채, 방인관, 정봉준 등이었다. 허위 계열은 박정빈, 김준수, 연기우 등이 주축이었다. 이렇게 보면 13도 창의대진소는 사실상 강원도와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부지방의 연합 의병 부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전국적 연합 의병 부대라는 13도 창의대진소의 상징성은 큰 것이었다.

[13도 창의군의 활동과 좌절]

13도 창의대진소 소속 의병의 숫자는 1만여 명이었고 해산 군인과 포군은 약 3천 명 정도였다. 의병 부대의 조직 개편이 끝나자 13도 창의군은 서울 탈환을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 기본 구상은 전 병력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집결하여 대오를 정비하고, 정월을 기하여 서울에 입성한다는 것이었다. 총대장 이인영의 서울 진격 목적은 통감부를 타격하여 이른바 ‘성하(城下)의 맹(盟)’을 맺어 신협약으로 불리는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등을 파기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의거해 먼저 허위의 선봉대 300명을 파견하였다. 허위의 선봉대는 미처 본대가 도착하기 전인 1908년 1월 15일에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3일이 지나서 이인영이 2,000명의 병력과 함께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하여 후군을 기다렸으나 선봉대의 패배가 준 타격은 컸다. 이런 상황에서 1908년 1월 28일 이인영은 아버지의 부음을 접하게 되자 뒷일을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경상북도 문경의 본가로 내려가게 된다. 또한 이인영이 귀향하면서 진격 작전을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의병 부대에 보냈기 때문에 13도 창의대진소의 서울 진격 작전은 중지되고 말았다.

[남양주 지역에서 이어진 의병 활동]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에서는 13도 창의대진소의 활동 이후에도 의병 활동이 지속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에서 활동을 이어 간 대표적인 인물은 이은찬, 강기동, 박순군, 이재윤, 정충환 등이었다.

이은찬 의병부대는 1908년 12월에 포천헌병분견소로 격문을 보내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격문으로 일본군을 유인한 이은찬 연합 의병은 경기도 가평으로 이동하여 전투 준비를 하였으며, 결국 일본군과 경기도 가평군 상면(上面) 서파동(西派洞) 인근에서 전투를 벌였다. 1909년 1월에는 경기도 포천헌병분견소 수비대와 교전하였다가, 군자금 및 병력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당분간 부대를 재정비하였다. 1909년 2월 말에는 경기도 양주군 덕도리[현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덕도리] 인근에서 헌병들과 전투를 벌였고, 이때 받은 타격으로 윤인순 휘하의 부대와 분리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에 이은찬 연합 의병은 1909년 3월 초에 경기도 양주군과 경기도 포천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패배하였고, 1909년 3월 중순 시작된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에 의해 해산되었다.

다음으로 강기동 의병부대의 활동이다. 헌병 보조원 출신 강기동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고안헌병분견소(高安憲兵分遣所)에서 근무하다가 헌병 부대로 끌려온 의병들을 탈출시키고 자신도 탈출하여 창의원수부에 합류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은찬 휘하에서 활동하던 강기동은 1909년 3월 이은찬이 체포되자 이은찬의 뒤를 이어 창의원수부를 재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09년 6월에 경기도 양근군[현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강상면·강하면·옥천면·양서면·서종면,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하고 1909년 7월부터 1909년 11월까지 일본군과 다양한 교전을 벌이면서 활약하다가 1909년 11월 중순부터 연기우의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박순근이은찬의 의병 부대에서 부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13도 창의군 해산 이후 박순근이은찬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창의신진소(倡義信陣所) 대장으로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를 비롯한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박순근 의병부대는 1908년 서울 화계사(華溪寺) 일대,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金村面)[현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이패동·삼패동·금곡동·호평동 일대] 조운리(朝雲里), 경기도 양주군 미음면(美陰面)[현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지금동·수석동 일대],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外西面) 비금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내방리] 등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한 바 있다.

이재윤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해당하는 양주군 미음면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을 비롯한 경기도 양주군·광주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최익현의 지시에 따라 1907년 청으로 건너가서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일제의 침략에 맞설 구원병을 요청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정충환은 현재의 남양주시 일대를 비롯한 경기도 동북부 지역에서 활동한 황재호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 황재호 의병 부대원들과 함께 경기도 양주군 묵은면(墨隱面)[현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경기도 포천군 덕둔리(德屯里)[현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덕둔리]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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