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가 낳은 시인, 조지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018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최빛나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9년 4월 - 남양주가 낳은 시인, 조지훈 『문장』을 통하여 등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 6월 - 남양주가 낳은 시인, 조지훈 을유문화사에서 『청록집』 발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년 11월 - 남양주가 낳은 시인, 조지훈 창조사에서 첫 시집 『풀잎단장』 발간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국문학자.

[개설]

조지훈(趙芝薰)[1920~1968]은 1940~1960년대에 주로 활동한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출신이며,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박목월(朴木月)[1915~1978], 박두진(朴斗鎭)[1916~1998]과 함께 청록파(靑鹿派) 시인으로 꼽힌다. 『청록집(靑鹿集)』, 『풀잎단장』, 『역사 앞에서』, 『여운』 등의 시집을 남겼다. 1968년 사후에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에 안장되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

조지훈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박두진, 박목월 등과 함께 청록파의 일원이었다.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이 청록파로 불리게 된 계기는 1946년 간행한 『청록집』이었다. 세 사람은 등단에서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다. 조지훈의 등단은 1939년 4월 『문장(文章)』에 발표한 「고풍의상(古風衣裳)」으로 이루어졌다. 정지용의 추천 덕분이었다. 청록파의 나머지 일원인 박두진과 박목월도 같은 해인 1939년 『문장』으로 등단하였다.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가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에게 합동 시집의 간행을 요청하여 발간된 시집이 바로 『청록집』이었다. 『청록집』의 발간을 계기로 하여 삼인방은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청록집』은 현대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자연을 노래한 시집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청록파의 시풍은 당시 유행하던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과는 달리,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전 정신의 부활과 순수 서정시 세계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말이었음에도 한글로 작품을 발표하였고 광복 후에도 시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조지훈은 고전미에 문화적 동질성을 담아 일제에 저항하는 시를 썼다. 한학자인 할아버지에게 받은 교육의 영향으로 조지훈의 시 중심에는 유교와 한문학적 전통을 토대로 한 지사적 선비 정신이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에 의하여 조지훈의 시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함께 안타까움과 슬픔의 정조가 자리하게 되었다.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을 중심으로 한 좌파들이 문단을 주도하자, 청록파는 이에 맞서 우익계의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에 참여하였고, 특히 젊은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朝鮮靑年文學家協會)에 적극 가담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하였다. 일제 강점기라는 암흑기에 저명한 문인들이 일제의 강요나 사상 전향으로 대거 ‘친일 문학’을 하였지만 청록파 시인들은 붓을 꺾고 낙향하였다. 청록파 시인들이 문단의 신예였기에 일제의 강요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바탕에는 시의 순수성과 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굳건한 의식이 내재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지훈의 작품과 삶]

조지훈은 수많은 작품을 남겼던 시인이며, 교육자이자 연구자였고, 현실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지식인이었다. 1920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난 조지훈은 1941년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립하였고, 이후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기획 위원장, 한국시인협회(韓國詩人協會) 회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지금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초대 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조지훈은 『청록집』, 『풀잎단장』[1952],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등의 시집과 『시와 인생』[1953], 『창에 기대어』[1958], 『지조론』[1962], 『돌의 미학』[1964] 등의 수상집, 그리고 『시의 원리』[1953], 『한국문화사서설』 등의 논저 등 시인이자 한국학 연구자로서 다양한 글을 남겼다.

조지훈이 남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많은 시가 현재까지도 읊어지며 민족시의 명작으로 평가된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조지훈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느 누구도 훼손하지 못할 만큼 확고부동하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을 이어 조지훈은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조지훈의 작품 활동의 시작이 된 『문장』에는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이 실렸다.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고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풍의상」에서는 전아한 한국의 여인상을, 「승무」에서는 승무의 동작과 분위기가 융합된 고전적인 경지를 노래하였으며,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지(告知)하였다.

『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고사(古寺)」와 「낙화(落花)」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들 시편에 담긴 불교적 인간 의식은 사상적으로 심화되지 않았으나, 유교적 도덕주의의 격조 높은 자연 인식 및 삶의 융합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풀잎단장』과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은 『청록집』에서 보인 전통 지향적 시 세계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지훈이 현실에 대한 관심과 참여 의지를 증폭시킨 것은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였다. 조지훈은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지훈의 시풍도 전환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 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있는데, 종래의 『청록집』 등에서 나타난 시 세계와는 달리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풀잎단장』과 『조지훈시선』 등 이전의 시가 자연과 무속 등을 주제로 한 서정적이고 동양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이후에 발표한 시집 『역사 앞에서』부터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및 6·25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으로는 「역사 앞에서」, 「다부원(多富院)에서」, 「패강무정(浿江無情)」 등이 있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로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국면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같은 시기에 저술한 『지조론』에서는 강한 민족적 색채가 드러난다. 1950년대 말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의 내부적 통합을 이끌어 나가야 할 중요한 시점에서, 집권 자유당은 정권 연장에만 집착하는 반민주주의적 모습만을 드러냈다. 정치 현실은 극도로 혼란하고 부패가 만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친일파들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 나섰고, 정치 지도자들마저 신념이나 지조 없이 시대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조지훈은 『지조론』에서 이러한 세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하였다.

조지훈은 근면하면서 여유 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였다.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조지훈은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 위에 재능과 교양과 인품이 조화를 이룬 대인이었다. 조지훈의 삶은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삶의 지표가 되고, 조지훈의 작품은 물질을 중시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마음의 치유가 되어 준다.

[남양주와 조지훈]

시인이자 학자, 교육자로 평생을 바친 조지훈은 1968년 사망 후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마석우리에 묻혔다. 조지훈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이나 평소 어머니가 묻혀 있는 경기도 남양주에 안장되길 바란 유지에 따라 마석역 부근 송라산(松羅山) 기슭에 만년 유택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현재 묘역에는 어머니 전주 류씨(全州 柳氏)의 묘와 조지훈의 묘가 상하분으로 모셔져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남양주시는 조지훈의 사거(死居)로서 일찍부터 조지훈을 기리려는 노력을 시도하였다.

우선 조지훈문학제가 있다. 조지훈은 남양주시를 대표할 만한 문학인이자 학자이기에 충분하다. 조지훈이 남양주시에 묻힌 지 40년이 되던 해인 2008년, 한국문인협회 남양주지부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남양주지부가 조지훈을 기리는 행사를 하자는 뜻을 모았다. 여기에 남양주시의 후원도 더하여졌다. 이에 2010년 고려대학교 교수 최동호를 초청하여 문학 강연을 개최하고, 2011년에 드디어 첫 번째 문학제를 개최하였다. 조지훈문학제는 시 낭송, 글쓰기, 그림 그리기 대회와 문학 강연, 축하 공연 등 다양한 구성을 통하여 남양주시를 찾는 사람들에게 즐길 거리를 제공함으로써 문화와 예술의 중심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2012년, 조지훈 사후 45주년에는 묘소와 가까운 마석역 광장에 시비(詩碑)를 건립하였다. 남양주시는 조지훈의 묘소에서 굽어볼 수 있는 마석역 광장에 시비를 세워 조지훈의 업적과 유훈을 사표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뜻은 남양주시의 적극적인 후원과 함께 한국문인협회 남양주지부 회원들의 기금이 더하여져 완성되었다. 시비에는 조지훈의 시 「풀잎단장」과 함께 조지훈의 제자인 고려대학교 교수 최동호가 쓴 건립기가 새겨졌으며, 조각은 전항섭이 맡았다. 2012년 10월 20일, 제2회 조지훈문학제와 더불어 시비 건립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조지훈을 추모하고 조지훈의 시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한 남양주시의 노력은 시비를 통하여 마석역 광장을 찾는 많은 방문객에 전달되고 있다.

2020년에는 ‘조지훈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지훈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2020년 11월 20일, 남양주시는 조지훈의 묘역에서 고유제를 올리며 제10회 조지훈문학제의 시작을 알렸다. 오전에 고유제를 지낸 이후, 남양주아트센터에서는 조지훈문학상 시상식, 문학 강연, 조지훈문학제 10년의 기록 상영과 함께 조지훈문학제 후원을 위한 ‘이혜숙초대전’도 열렸다. 시 낭송 대회와 축하 공연 등의 행사를 통하여 시민 참여도 매우 높아졌다. 특히 2020년에는 조지훈의 탄생 100주년이었던 만큼, 남양주시는 『조지훈 선집-조지훈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을 발간하여 기념하고자 하였다. 책에는 조지훈의 시집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 『여운』과 수필집 『지조론』, 『돌의 미학』, 『창에 기대어』, 『시와 인생』에 수록된 작품 중 89편의 시와 12편의 수필을 모았다. 『조지훈 선집』은 많은 독자가 조지훈의 문학 세계와 폭넓은 만남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 남양주시의 바람과 고심으로 엮은 결과물이다. 남양주시의 조지훈문학제는 계속 이어져 2021년에 제11회를 맞이하였으며, 이외에도 조지훈문학상을 운영하여 2021년까지 다섯 차례의 조지훈문학상 수상자가 탄생하였다.

남양주시는 최근 화도읍 마석우리 6만㎡에 근린공원 조성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공원에는 산책로와 광장 등을 비롯하여, 놀이터, 체육 시설 등을 설치할 계획이다. 특히 해당 공원 부지에는 조지훈 묘소가 있어 조지훈을 테마로 한 공원을 꾸며 묘소로 가는 산책로를 조성하고 안내판 등을 설치할 예정이다. 남양주시는 숨은 역사적 가치를 발굴하고 도시 품격을 높인다는 취지 아래, 조지훈의 가치를 시민들이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방안을 다양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조지훈이 잠들고 싶었던 남양주를 통하여 조지훈의 삶과 정신을 계속 이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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