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치반대 면민대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25
한자 託治反對 面民大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태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5년 12월연표보기 - 탁치반대 면민대회 모스크바 3국 외상 회담에서 신탁 통치 실시 결정
전개 시기/일시 1945년 12월 28일 - 탁치반대 면민대회 김구와 임시 정부 중심의 각계 대표자 회합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45년 12월 29일 - 탁치반대 면민대회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46년 1월 1일 - 탁치반대 면민대회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덕소국민학교에서 탁치반대 면민대회 개최

[정의]

해방 직후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 일어난 신탁 통치 반대 면민 대회.

[역사적 배경]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기 전에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전후 처리 문제를 두고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연합국의 전후 처리 문제 합의는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간의 3국 외상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3개국은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간의 신탁 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결정서에 합의하였다.

사실 신탁 통치는 미국의 오래된 공식적인 전후 처리 방침이었다. 필리핀의 신탁 통치가 이루어진 예에서 보이듯이 미국은 식민지였던 국가에 신탁 통치를 실시하자는 입장이었지만,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던 영국 등이 맹렬하게 반대하여 제대로 실시되지는 않았다. 한국에 대하여서도 미국은 신탁 통치를 실시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 문제의 최종 결정이 가능하였던 것은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을 앞세우고 임시 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간의 신탁 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소련의 안을 미국이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소련이 신탁 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라고 보도하였다.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은 사실 관계가 부정확한 오보에 가까운 것이었음에도 국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46년 1월 소련의 타스 통신이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한국 문제 결정 내용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보도하였지만, 이미 벌어진 사태를 어쩔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즉각적으로 광범위한 반대 운동을 촉발시켰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막 벗어난 상황에서 또 다시 신탁 통치를 받는다는 보도 내용은 광범위한 대중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신탁 통치안이 보도된 1945년 12월 28일 김구와 임시 정부가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의 회합이 열리고, 1945년 12월 29일에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반탁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경과]

신탁 통치가 이뤄지게 된다는 비보를 들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지역의 주민들은 1946년 1월 1일에 지금의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양주군 와부면 덕소리]에 있는 덕소국민학교에 모여서 면민 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곽행서를 의장으로 하여 탁치 절대 반대·즉시 완전 독립을 결의하고, 결의문을 즉시 임시 정부 주석 김구와 미군 사령관 하지에게 전달하였다.

[결과]

1945년 12월부터 1946년 초까지 지속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은 해방 정국의 정치 지형을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이 국내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신탁 통치 결정이 소련에 의한 것으로 왜곡되면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은 반소반공(反蘇反共)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좌익에 비하여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우익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임시 정부를 비롯한 우익 세력은 민족 감정에 호소력이 컸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정국을 주도하고 일반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반면 삼상 결정 절대 지지를 내세운 좌익 세력은 신탁 통치 정국을 거치며 대중적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심지어 ‘신탁 통치 배격 운동에 협력하지 않은 자는 민족 반역자로 규정’한다는 구호 아래 민족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은 한국의 정치 지형뿐만 아니라 정치적 대립 구도 또한 변화시켰다. 신탁 통치 파동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좌우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정치적 대립 구도가 보다 주요한 기준이었고, 민족 통일 전선에 대한 대중적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좌우 어느 세력도 모두 표면적으로는 연합과 단결을 내걸었다. 그러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계기로 한국 정치 세력 간의 대립 구도는 ‘민족 대 반민족’에서 좌우 대립으로 변화하였다. 우익 측에서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계기로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비상국민회의’라는 우익 연합 조직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미 군정의 자문 행정 기구적 성격을 갖는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을 조직하였다. 반면 좌익 측에서는 이에 대항하여 좌익 연합 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함으로써 한국 정치의 좌우 구분이 정착되었다. 결국 본격화된 좌우 대립은 신탁 통치 반대 운동 도중 벌어진 테러 사건들에 잘 나타나듯이 그야말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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