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97
한자 孤山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조선 후기 - 고산촌 건립
소재지 고산촌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지도보기
성격 별서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일원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조선 후기 문인 윤선도의 별서지.

[개설]

고산촌(孤山村)은 조선 시대 문인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별서지(別墅地)이다. 윤선도의 자는 약이(約而)이며, 호는 고산(孤山) 외에도 해옹(海翁)이 있다.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에 실린 부록 「시장(諡狀)」에 따르면 윤선도의 거처가 남쪽 바다에 있었고, 양주(楊州) 고산에도 있었기에 윤선도를 ‘해옹’이라고도 칭하였고, ‘고산’으로도 칭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윤유심(尹唯深)[1551~1612]이다. 윤선도는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큰아버지 윤유기(尹唯幾)[1554~1619]에게 입양되었다. 윤선도는 남인으로, 서인과의 당쟁에 연관되어 20여 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일생의 대부분을 초야에서 은거하였다. 다수의 한시문(漢詩文)이 실린 문집 『고산선생유고』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이 전하며, 정철(鄭澈)[1536~1593]·박인로(朴仁老)[1561~1642]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진다. 고산촌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일원으로 추청된다.

[위치]

『고산선생연보(孤山先生年譜)』에 따르면 윤선도의 별서는 서울 30리[약 12㎞] 밖 양주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고산선생유고』 등에 따르면 윤선도는 별서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였고, 말년에 병을 앓을 때 역시 별서에 다시 초가를 짓고 생활하며, 왕의 명이 있을 때에만 고산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따르면 풍양현치로부터 남쪽에 풍양천이 있었는데, “동쪽으로 흘러 왕산탄(王山灘)이 되고 양진(楊津)으로 흘러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윤선도의 시 「곡수대(曲水臺)」에 달린 주에는 “왕산탄은 고산(孤山)에 있다.”라고 나온다. 지형을 고려하였을 때 고산 인근을 흐르며, 풍양현치 남쪽의 천 및 양진(楊津)으로 흐를 수 있는 한강과 연결되는 하천은 현재의 왕숙천(王宿川)이다. 따라서 고산촌왕숙천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남 윤씨 문중에서는 윤선도 관련 고문서에 독포(禿浦)가 종종 확인되는 것에 주목하여 더 자세히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관련 고문서에 의하면 윤선도가 28세 때 전답과 함께 독포 정자를 매입한 기록이 있고, 74세 때와 사후 1년 뒤 독포에 거주하였던 노비들의 존재가 확인된다. 『동국여지지』에 독포는 광주의 치소로부터 북쪽 20리[약 8㎞] 거리에 있으며, 한강이 꺾여 도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왕숙천한강이 모두 관련된 위치여야 하므로, 고산촌은 두 하천이 합류하는 현재 남양주시 수석동 일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황]

고산촌은 지표상 변화 및 하천 직강화로 인하여 현재는 옛 고산의 풍경을 엿볼 수 없다. 주변의 능선은 도로에 의하여 분할되어 있고, 왕숙천 구하도 유역도 모습이 유실되었다. 직강화 이후 과거 왕숙천 물길지는 농업 용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구하도 지역은 습지와 물웅덩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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