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577
한자 李德馨
영어공식명칭 Yi Deokhyung
이칭/별칭 명보(明甫),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한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1년연표보기 - 이덕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이덕형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이덕형 사가독서(賜暇讀書)
활동 시기/일시 1588년 - 이덕형 일본 사신 겐소 등을 접대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이덕형 선조 호종
활동 시기/일시 1593년 1월 - 이덕형 이여송의 명군과 함께 평양수복
활동 시기/일시 1598년 - 이덕형 우의정 승진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이덕형 경상·전라·충청·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05년 - 이덕형 용진[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별서를 지음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이덕형 영의정 복직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이덕형 관직 삭탈
몰년 시기/일시 1613년연표보기 - 이덕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33년 - 이덕형 시호 문익(文翼) 증시
추모 시기/일시 1691년 - 경기도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에 배향
묘소|단소 이덕형 묘소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1
사당|배향지 근암서원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금천로 351-5[서중리 148-1]
사당|배향지 용연서원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로 78[신평리 168-1]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광주(廣州)
대표 관직 병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영의정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별서를 두고 거주하였던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이후 경기에 관한 군정과 민정을 감독하였으며, 전란 이후 국가 통치 체제 복원과 민심 수습에 힘썼다.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였던 이덕형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기한 후에,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후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가계]

이덕형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5대조가 연산군대 갑자사화(甲子士禍) 당시 사사된 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이수충(李守忠)이고, 할아버지는 증 좌찬성(贈左贊成) 이진경(李振慶)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이고 어머니는 현령(縣令) 유예선(柳禮善)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산해의 딸 한산 이씨(韓山 李氏)이다. 부인 이씨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 28세에 절사(節死)하여 국가에서 정문(旌門)을 세워서 표창하고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하였다

첫째 아들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이여규(李如圭)이고, 둘째 아들은 현감(縣監)을 지낸 이여벽(李如璧)이며, 셋째 아들은 가선대부(嘉善大夫) 감사(監司)를 지낸 이여황(李如璜)이다. 딸은 부사(府使) 정기숭(鄭基崇)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이덕형은 1561년(명종 16)에 태어났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고 이후 정자(正字), 박사(博士),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후 부수찬(副修撰), 정언(正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1588년(선조 21) 이조정랑으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하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측 인사와 접촉하여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파천(播遷)하는 선조를 호종(扈從)하여 의주에 도착한 후, 이항복(李恒福)과 명(明)에 원병을 요청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일본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파죽지세로 조선의 한성(漢城)으로 향하고 있을 때, 일본 사신과 화의를 도모했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은 지원군 요청에 성공하여 이듬해인 1593년 1월 이여송(李如松)의 명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였다. 전쟁 중에 이덕형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훈련도감(訓鍊都監) 당상(堂上)을 역임하였다. 1595년(선조 28)에는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 체찰부사(體察副使) 등을 지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였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 1601년 경상·전라·충청·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1605년(선조 38) 벼슬에서 물러난 후 아버지를 봉양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용진(龍津)[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별서를 짓고 은행나무를 심었다. 별서의 이름은 ‘대아당(大雅堂)’이며 읍수정(挹秀亭)과 이로정(怡老亭)이라는 두 개의 정자도 지었다. 읍수는 주변의 빼어난 경치를 담아 온다는 뜻이고, 이로는 벼슬에서 물러나 여생을 즐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잠시 한직에 있던 이덕형은 1608년(선조 41)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뒤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1613년 이덕형이항복 등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다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후 용진에 머물며 나랏일을 걱정하다 1613년(광해군 5)에 병으로 죽었다.

[학문과 저술]

글씨에 뛰어났고, 저술로는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묘소]

이덕형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1에 있고, 묘역 입구에는 1653년(효종 4)에 세운 이덕형 신도비가 있다. 이덕형의 묘와 신도비는 1985년 9월 20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633년(인조 11) 1월 조정에서 이덕형문익(文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경상북도 문경의 근암서원(近巖書院)과 경기도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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