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635
한자 丁若鏞
영어공식명칭 Jeong Yagyong
이칭/별칭 미용(美鏞),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채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62년 6월 16일연표보기 - 정약용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89년 - 정약용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89년 - 정약용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
활동 시기/일시 1792년 - 정약용 홍문관수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95년 - 정약용 동부승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95년 7월 - 정약용 충청도 금정 찰방으로 좌천
활동 시기/일시 1801년 - 정약용 장기현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818년 - 정약용 해배
몰년 시기/일시 1836년 2월 22일연표보기 - 정약용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10년 - 정약용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에 추증 및 시호 ‘문도(文度)’ 하사
출생지 능내리 -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지도보기
부임|활동지 파주시 - 적성(積城)[경기도 파주시]
부임|활동지 인천광역시 - 마전(麻田)[인천광역시 서구]
부임|활동지 청양군 - 충청도 금정(金井)[충청남도 청양군]
유배|이배지 포항시 - 장기현[경상북도 포항시]
유배|이배지 강진군 - 강진[전라남도 강진군]
묘소|단소 정약용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능내리 산75-1]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나주(羅州)
대표 관직 동부승지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가계]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이다. 할아버지는 정지해(丁志諧), 할머니는 홍길보(洪吉輔)의 딸 풍산 홍씨(豊山 洪氏)이다. 아버지는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이며, 첫째 어머니는 남하덕(南夏德)의 딸 의령 남씨(宜寧 南氏)이고, 친어머니는 윤덕열(尹德烈)의 딸 해남 윤씨(海南 尹氏)이다. 부인은 홍화보(洪和輔)의 딸 풍산 홍씨(豐山 洪氏)이고, 아들은 정학연(丁學淵)·정학유(丁學游)이다. 사위는 해남 윤씨 윤영희(尹榮喜)이다. 이복형은 정약현(丁若鉉)이고, 동복형은 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이다.

[활동 사항]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에서 태어났다. 1771년 아버지에게 성리학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배웠고, 1776년 병마절도사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혼인하였다.

정약용은 1789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규장각 초계문신(抄啟文臣)에 선발되어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였다. 1790년 예문관검열,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등 요직에 임명되었고, 1792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1792년 4월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 1794년 성균관직강이 되었으며, 암행어사가 되어 적성(積城)과 마전(麻田) 등의 민정을 살폈다. 1795년 동부승지가 되어 정조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였다. 그러나 1795년 7월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연루되어 충청도 금정(金井) 찰방(察訪)으로 좌천되었다. 1796년 초계문신으로서 이만수(李晩秀), 이재학(李在學),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기영선(史記英選)」을 교정하였다. 1797년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는데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를 올려 젊었을 때 천주교를 믿은 것은 사실이나 30세 이후에는 그러지 않았음을 밝히면서 사직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외직인 곡산부사(谷山府使)가 되었고, 1797년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완성하였다. 1800년 다시금 천주교 문제로 인하여 상소를 하고서 마현리로 낙향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천주교도가 탄압되었는데 천주교도의 집안에서 정약용 집안의 서찰이 나온 것으로 인하여 형 정약전 등은 하옥되었고 정약용은 장기현에 유배되었다. 1801년 10월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금 강진으로 이배(移配)되었고 형 정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옮겨졌다. 1818년 응교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인하여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정약용은 1836년(헌종 2) 2월 22일 고향인 마현리에서 75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약용은 18년의 유배 생활 동안 강학(講學)과 연구, 저술에 전념하여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시 조선조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여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의 저서를 찬술하였고,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전하고 있다.

[묘소]

정약용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약용은 1910년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었고, 시호 문도(文度)를 하사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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