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34
한자 李堈
영어공식명칭 Yi Kang
이칭/별칭 의왕(義王),의친왕(義親王),의화군(義和君)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7년연표보기 - 이강 출생
혼인 시기/일시 1893년 - 이강 연안 김씨와 혼인
몰년 시기/일시 1955년연표보기 - 이강 사망
묘소|단소 의친왕묘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6 지도보기
성격 왕족
성별 남성
본관 전주(全州)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소가 있는 조선 왕실의 왕족.

[가계]

이강(李堈)[1877~1955]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고종(高宗)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귀인 장씨(貴人 張氏)이며, 1893년 김사준(金思濬)의 딸 연안 김씨(延安 金氏)와 가례를 올렸다. 아들은 이우(李鍝)·이건(李健) 등이다.

[활동 사항]

이강은 1877년(고종 14)에 태어나 1891년 의화군(義和君)으로 책봉되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인 1900년 의왕(義王)에 책봉되었으나,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이후 공(公)으로 격하되었다.

이강은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항일 독립투사들과 긴밀히 접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 명의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나는 등 독립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서울에서 조선 민족의 정신 통일 및 실력 양성을 표방하며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결성하였는데, 이강도 행동을 함께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민족 역량을 결집함으로써 독립 운동의 구심 역할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바탕으로 서울에 본부를 두고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였으며, 독립 의식의 고양을 목적으로 하는 선전 활동과 ‘제2회 독립 만세 시위’를 추진하려 하였다. 이후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 오자 조선민족대동단은 본부를 중국 상하이[上海]로 옮기기로 계획하고, 1919년 10월 10일 김가진이 먼저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국내에서의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계획하는 한편, 이강의 중국 망명을 추진하였다. 망국의 왕자인 이강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면 대외적으로 독립 운동을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강은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하여 1919년 11월 9일 서울을 출발한 뒤 기차를 타고 한·중 국경인 중국 안동현[현 중국 단둥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에게 현지에서 체포된 뒤 송환됨에 따라 이강의 중국 상하이 망명 추진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강은 이후에도 조선민족대동단 인사들과 함께 제2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제의 거듭된 도일(渡日) 강요를 거부하는 등 항일 기조를 유지하였다. 이강의화군 또는 의왕·의친왕(義親王) 등으로 불리며, 광복 후인 1955년 사망하였다.

[묘소]

이강의 묘는 남양주시 금곡동 141-6에 있다. 사망한 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西三陵) 경내 귀인 장씨의 묘소 근처에 묻혔다가, 1996년 홍유릉 경내로 이장되어 부인 연안 김씨와 합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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