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967
한자 妙寂寺
분야 종교/불교
유형 기관 단체/사찰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수레로661번길 174[월문리 222]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종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수|중창 시기/일시 1895년 - 묘적사 산신각 중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95년 - 묘적사 산왕신상(山王神像) 봉안
중수|중창 시기/일시 1971년 - 묘적사 대웅전과 요사채 중건
현 소재지 묘적사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수레로661번길 174[월문리 222]지도보기
성격 사찰
창건자 원효(元曉)
전화 031-577-1761
홈페이지 http://ayw.templestay.com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 소속 사찰.

[개설]

묘적사(妙寂寺)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전하여지는 사찰이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묘적산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 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신라의 승려 원효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하지만, 그 자세한 경위는 확인할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양주목(楊州牧)」조에서는 묘적산(妙寂山)이 고을 동쪽 70리[약 27.5㎞] 지점에 있으며, 여기에 묘적사가 자리하였다고 소개한다.

조선 전기까지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묘적사중창기(妙寂寺重創記)」에 따르면 고려 시대 지눌(知訥)과 같은 고승도 머물렀던 유서 깊은 사찰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나아가 「묘적사중창기」에서는 신빈 김씨(愼嬪 金氏)가 세종을 위하여 자금을 내어 묘적사를 중창하려고 하였으나 중단되었고, 이후 밀성군(密城君)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곧 조선 전기에는 왕실의 후원하에 건립된 성대한 사찰로서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도 관련 기록이 거의 없어 폐사화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조선 후기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묘적사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절의 명맥 자체는 계속 이어져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조선 후기의 여러 문인들이 묘적산을 유람하며, 묘적사에 대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곧 조선 후기에도 묘적사는 남양주 일대와 묘적산의 대표적인 명승지로서 오랫 동안 인식되었다. 그렇지만 대웅전 동쪽 20m 지점에는 이제면(李濟冕)이라는 인물의 묘와 묘비가 있어 묘비가 세워진 1720년(숙종 46)에는 이 일대가 묘역으로 사용되었으며, 곧 절이 상당 부분 폐허화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묘적사의 연혁은 자세하지 않지만 김교헌(金敎憲)이 쓴 「산신각창건기(山神閣創建記)」에 의하면 폐사로 남아 있었으나 1895년 규오(圭旿)가 산신각을 중건하고 산왕신상(山王神像)을 모셨다고 한다.

1969년 화재로 인하여 산신각 등이 전소되었으나, 1971년 주지인 자신(慈信)이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건하였다.

[활동 사항]

2015년에는 대웅전 앞 팔각다층석탑의 보수와 위치 이전을 위하여 탑을 해체하고 건물 주변을 조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청자 등 45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2018년에는 2015년에 발견된 유물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고한 보고서를 발간하였으며, 발견된 유물은 심의 이후 묘적사에서 소유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묘적사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묘적사의 사찰 건물로는 대웅전과 승려들이 거주하는 건물인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 안에는 불상 뒤에 배치하는 탱화인 후불탱화(後佛幀畵)와 더불어 산신탱화(山神幀畵), 칠성탱화(七星幀畵) 등이 그려져 있다.

법당 외에 템플스테이 시설로 향운정, 서암당, 동암당을 갖추고 있으며, 명상수련관과 무영루가 있다.

[관련 문화재]

묘적사에는 남양주 묘적사 팔각다층석탑(南楊州 妙寂寺 八角多層石塔)이 있는데, 2013년 11월 1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남양주 묘적사 팔각다층석탑은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팔각다층석탑으로 묘적사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다. 지면 바로 위에 세운 지대석(地臺石)은 팔각형으로 된 2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에는 2매로 된 하층 기단이 놓여져 있다. 기단은 아래에서부터 하층기단, 중대석(中臺石), 상층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시 팔각형으로 된 탑신에는 각 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인 우주(隅柱)를 표현하였다. 탑의 위쪽에 지붕 형태를 가진 덮개돌인 옥개석(屋蓋石)은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추녀에 해당하는 부분의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탑의 꼭대기에 원기둥 모양의 장식이 있는 상륜부(相輪部)는 반구형으로, 그 둘레에 삼각형 기하학 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의의와 평가]

묘적사는 고려 시대의 지눌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등, 관련 기록이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점에서 오랜 기간 유서 깊은 사찰로서 명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곳으로서 조선의 도성에 인접하여 그 융성함을 이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조선 시대의 어느 시점에서는 폐사에 가까울 정도로 쇠락한 시기도 있었지만, 19세기 중건되기 전까지 명승지로 인식된 묘적산을 찾는 문인들에 의하여 꾸준히 언급되고 있었다. 곧 묘적사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남양주 지역 불교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대표적인 고찰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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