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50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공식명칭 Korean War
이칭/별칭 한국 전쟁,6.25 사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6.25 전쟁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연표보기 - 6.25 전쟁 종결, 휴전 협정 체결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24일 - 성주군 수복
발생|시작 장소 6.25 전쟁 - 경상북도 성주군
종결 장소 6.25 전쟁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국군|인민군|유엔군|국민보도연맹

[정의]

1950년 6월 말부터 10월까지 성주 지역에서 나타난 6.25 전쟁의 양상.

[개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성주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남한과 북한 간의 전쟁을 말한다.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 불린다.

[역사적 배경]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발발하였다. 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국군은 별다른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하였다. 서울이 3일 만에 인민군에게 점령당했으며,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국군은 후퇴하면서 경찰과 함께 국민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높다고 간주하고 이들을 예비 검속하였다. 예비 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은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과 함께 국군과 경찰에게 집단 학살당하였다.

[경과]

전쟁이 발발하자 성주에서도 6월 29일부터 경찰이 상부의 지시로 국민보도연맹원을 예비 검속하였다. 국민보도연맹원의 예비 검속은 7월 중순까지 진행되었으며, 성주경찰서와 각 면 소재 지서의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전쟁 상황은 날로 악화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주요 거점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실패하며 후퇴를 거듭하였다. 결국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하였다.

성주경찰서는 상부로부터 예비 검속한 국민보도연맹원을 학살하고 낙동강 동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경찰은 지시에 따라 다른 지역에서 후퇴한 경찰과 합세하여 7월 14일부터 7월 30일까지 최소 90명에서 최대 260여 명에 이르는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 학살하였다. 집단 학살 후 공무원, 경찰과 군인 가족, 대한청년단, 우익 인사와 그 가족들이 비밀리에 낙동강을 건너 피난하였다.

대다수의 관공리(官公吏), 우익 인사와 가족들이 집단으로 피난을 떠나자, 성주 사람들도 피난을 서둘렀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주 사람들은 피난할 수 없었다. 왜관의 낙동강 철교가 방어선 구축 명목으로 8월 4일 폭파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민군의 낙동강 도하를 막기 위해 낙동강 제방을 중심으로 진지를 구축하여 피난민의 도하를 막아 피난이 더 어렵게 되었다. 피난 가지 못했던 사람들은 곧 들이닥친 인민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8월 3일 북한 인민군 제1군단 소속 제3사단이 성주를 점령하였다. 다음날 인민군이 성주를 완전히 장악하고 점령 정책을 실시하였다. 인민군은 먼저 치안대와 인민위원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8월 6일 면 단위의 치안대가 성주면 치안대를 시작으로 조직되었다. 치안대 대원은 해방 정국 시기에 남조선 노동당 당원이었거나 좌파 진영에서 활동했던 청년들이 중심이었다. 치안대 설치가 완료된 후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8월 15일 성주군 초전면에서 가장 먼저 인민위원회가 조직된 데 이어 성주면을 포함한 다른 면에서도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어 8월 말부터 9월까지 동 단위의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노동당도 결성되었다.

치안대는 내무서의 지시에 따라 성주 지역의 공무원, 우익 인사들을 체포하고 처형하였다. 학살된 사람은 경찰, 경찰 정보원, 면장, 면서기, 국민학교 교장, 대한청년단 단원, 유지 등 40여 명에 이르렀다. 학살은 국민보도연맹원의 집단 학살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짙었다. 아울러 인민군은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8월 10일부터 9월 중순까지 인민위원회의 주도하에 성주 전역에서 무상 몰수 무상 분배 방식의 토지 개혁이 실시되었다.

성주 사람들은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다. 인민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유엔군·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인민군은 성주 사람을 동원하여 김천군 조마면에 있는 인민군 병참 기지에서 탄약과 포탄, 식량 등 군수 물자를 낙동강 쪽에 포진해 있는 인민군에게 보급하였다. 또한 식량과 부식 재료 등 부족한 군수품을 치안대와 인민위원회를 통해 조달하였다. 동시에 사람을 동원하여 방공호나 전선의 참호를 구축하였다.

성주 사람들은 인민군의 병력 보충을 위해 8월 중순부터 치안대에 의해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 의용군은 간단한 훈련을 받은 후 낙동강 전선에 배치된 인민군에 배속되었다. 인민군이 성주에서 후퇴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 동원으로 성주 지역에 미군의 공습이 잦았으며, 이 때문에 많은 주민과 피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과]

1950년 9월 24일 성주군이 수복되었다. 수복 직후 경찰이 복귀하여 질서를 회복했으며,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자의 명부를 작성하고 검거에 착수하였다. 인민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치안대와 인민위원회의 고위 간부들은 인민군과 함께 퇴각하거나 인민군 퇴각 직후 피신하여 체포할 수 없었다. 경찰이 체포한 부역자는 부역 행위가 무겁지 않은 동 단위의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간부가 대부분이었다. 10월 28일 경찰은 이들 가운데 40여 명을 낙동강 모래밭에서 집단 학살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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